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주연 정단영 “조연서 주연 발탁… 페기, 저랑 똑같아요”

입력 2013-06-02 17:24


“넌 너만의 페기 소여가 아니라 우리 앙상블을 대표한다고 생각해. 앞에 나가서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줘.”

뉴욕 브로드웨이 스타가 꿈인 시골뜨기 페기 소여는 뮤지컬에서 ‘먼지에 불과한’ 코러스 걸. 주연을 맡은 스타 도로시가 갑자기 다치는 바람에 주역으로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었다. 공연 직전까지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초조해하지만 동료들의 응원에 힘을 얻는다. 30일까지 서울 신도림동 디큐브아트센터 무대에 올려지는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한 대목이다.

페기 역의 뮤지컬 배우 정단영(31)은 이 대목을 연기할 때마다 가슴이 찡하다. 극중 페기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페기가 고생 끝에 화려한 주역으로 비상했듯이 정단영도 뮤지컬 입문 10년 만에 ‘브로드웨이 42번가’로 첫 주연을 맡았다. 그를 지난달 30일 공연장에서 만났다.

정단영은 정통 발레리나의 길을 걸어왔다. 늦은 초등학교 5학년 말, 처음 발레를 접한 소녀는 기술은 부족했지만 체격 조건이 좋아 예원학교에 합격했다. 그 후 서울예고를 거쳐 이화여대 무용과에 진학하며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 주역 발레리나가 된다는 것이 참 어렵구나 생각하던 대학 시절, 영국 안무가 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백조의 호수’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클래식에 현대무용을 접목한 시도가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죠. 일정한 틀 안에서 규격화된 발레보다 자유롭고, 즐기면서 출 수 있는 춤이라서 더 좋았죠.”

친구들이 대학원 진학 준비에 한창일 때 뮤지컬 ‘킹 앤 아이’의 오디션을 봤다. 발레 경력은 앙상블 배우로 발탁되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히 주역에 대한 욕심을 키우면서는 ‘불합격’이라는 단어가 내내 따라 다녔다. 오디션에서 수도 없이 떨어졌다. “한두 번이야 그럴 수 있지 했지만 계속 떨어지다 보니 이 길이 맞는 걸까 좌절도 했죠.”

2004년 정단영은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코러스 역할을 했다. “그때 코러스를 하면서도 페기 역할이 정말 하고 싶었어요. 저처럼 발레를 전공한 김미혜(배우 황정민의 아내) 선배가 페기 역을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꿨어요.”

2009년 페기 역 오디션을 치렀지만 탈락. 재도전한 올해 오디션도 불합격. 완전 낙담해 다른 오디션을 보러 가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합격 통보였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인지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애초 불합격됐으나 결과가 번복됐다. 전남 순천에서 올라온 엄마는 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주연을 맡았지만 기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부담이 컸다. 그동안 ‘S.E.S’의 바다와 ‘핑클’의 옥주현이 거쳐 간 배역이다. 화려한 탭댄스와 군무가 볼거리인 이 작품은 배우들의 연습량도 다른 작품의 두 배가 넘는다. 정단영은 하루 12시간씩 독하게 연습했다. 약점으로 꼽히는 노래 실력을 보완하기 위해 공연 개막 후에도 노래 트레이닝을 계속 받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해외 프로덕션도 감탄할만한 탭댄스 실력을 선보이며 박수를 받고 있다.

정단영은 이 뮤지컬에서 코러스 역할을 하는 배우들의 맏언니이자 롤 모델이다. “앙상블을 거쳐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진 않죠. 저를 보면서 희망을 갖는 것 같아요. 그 친구들을 위해서 더 열심히 해야죠.”

어렵게 얻은 주인공 자리지만, 또다시 앙상블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두렵진 않다. “어느 하나의 배역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어느 무대에나 긴요하게 쓰이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