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정기] 지방자치의 힘
입력 2013-06-02 19:16
물, 풀, 흙, 수목이 멋대로 엉킨 버려진 황무지로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던 곳을 산보하며 내내 상쾌했다. 참으로 감동스런 변신이었다. 개발 시대를 겪으며 호수의 크기가 줄어 음지의 운명이 드리운 곳. 초등학교 시절 꽁꽁 얼어붙은 경포호에서 스케이트를 타면서 우리 중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곳. 그런 곳에 앙증맞게 조성된 생태시설과 습지, 탐방로를 걸으며 수려한 고향의 품격을 흠향했다. 지방자치가 이룬 내 고향 강릉 경포천 부근의 변화였다.
감동적으로 바뀐 내 고향 강릉
그저 있어만 주어도 고향은 언제나 반가운 법. 하물며 화사하게 단장한 모습은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에게는 벼락같은 감동이다. 며칠 전 캠퍼스에서 본 새 신부의 미소처럼 졸졸졸 흐르는 물은 거울처럼 맑았다. 호수, 하늘, 바다, 술잔, 사랑하는 님의 눈동자까지 다섯 개의 달이 동시에 뜨는 경포의 중심인 경포호를 둘러본 발길은 혁명을 꿈꿨던 홍길동전의 허균과 시대를 너무 앞서간 허난설헌의 생가로 곧장 이어진다. 달 표면에 첫발을 디디며 닐 암스트롱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고 했던가. 달만큼 발을 딛기 어려웠던 고향 땅을 주민들에게 되돌려준 자치가 이룬 도약에 감사했다.
어쩌면 이곳도 이런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잊혀진 여인처럼 서러워하며 누군가 찾아오기를 고대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 옛날 가시연이 있었다는 구전이 오랜 세월 잠들었다가 경포천 습지가 만들어진 후 길쭉한 점박이 하트 모양으로 세상에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수달도 나타나 가시연꽃을 반겼다던가. 이들 멸종위기 생물종들은 얼마나 참으며 기다렸을까. 참을 인(忍)을 마음에 새기고 살면 안 될 일이 없다던 우리네 엄마들처럼 기다렸으리라.
주민 스스로 지역사회 행정과 정치를 이끌어갈 장을 뽑아 지역의 살 길을 결정하는 지방자치제의 신묘한 힘은 이처럼 대단했다. 지방자치제는 저절로 온 것이 아니다. 역사는 순탄치 못했다. 1952년 시작했으나 5·16으로 근 30년이나 중단됐다. 정치적 진통을 거쳐 1991년 자치단체 의회, 1995년 6월 자치단체장 선출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가 개막되었다.
2010년 6월 2일 선거에서 선출된 일꾼은 서울시장을 비롯한 광역단체장 16명, 기초단체장 228명, 광역의원 761명, 기초의원 2888명, 교육감 16명, 교육의원 82명 등 모두 3991명이다. 지방자치제를 본질적으로 회의케 하는 작태도 빈번했다. 예를 들어 2006년에 취임한 민선4기 기초단체장 230명 가운데 47.8%인 110명이 비리와 위법 혐의로 기소되는(2010년 5월 2일 기준) 형편이니 지방자치 무용론이 나올 만했다.
더불어 산다는 원칙 일깨워
10만평이 채 못 되는 넓이에 펼쳐진 고향의 변화를 보며 지방자치야말로 대한민국이 선택한 제일의 현명한 대사건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서울공화국으로 대변되는 중앙 중심의 행정과 문화에 균형감은 물론이고 지역의 정체성과 주민의 행복감을 고양시킬 수 있는 최고의 제도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의 요구는 자신이 잘 알듯 지역이 원하는 것은 지역이 잘 아는 법이다. 금권과 비리에 물들지 않는 자치제를 잘 가꾸는 것이 지역도 대한민국도 행복하게 하는 것이리라.
수십 명의 관선 시장이 바뀌어도 할 수 없었던 함평의 나비, 순천의 갈대와 정원박람회, 화천의 산천어, 전국의 둘레길과 자전거길 같은 지방자치제의 창의성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땅, 주민의 발길, 가시연꽃, 수달을 돌아오게 한 고향의 자치는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한다.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오랜 공동체문화를 상기한다. 착한 지방자치를 만나면 모두가 돌아와 어울리며 정다워지리라.
김정기 (한양대 교수·언론정보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