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필교] 내 생애 아름다운 순간들

입력 2013-06-02 19:16


넝쿨장미가 아름답게 피는 계절이다. 울타리에 소담스레 핀 넝쿨장미를 보면 몇 해 전 하늘나라로 떠나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어느 날 저녁, 퇴근 후 집에 들어서니 내 방에 빨간 넝쿨장미 몇 송이가 화병에 꽂혀 있었다. “집에 누가 다녀갔어요?”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사연인즉 아버지가 골목을 지나가시다 장미가 탐스럽게 핀 것을 보셨는데, 마침 그 집 주인이 장미가지 치기를 하더란다. 그래서 내 생각이 나서 장미 몇 송이를 얻어 집안에 있던 화병을 찾아 내 방에 꽂아 두셨던 것이다. 그 순간 마음속에 작은 등 하나가 반짝 켜졌다. ‘85세 연로하신 아버지와 넝쿨장미….’ 아버지가 꽃을 선물해 주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때 아름다웠던 순간을 추억의 앨범 속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 보곤 한다.

얼마 전 주위 사람들과 ‘내 생애 아름다운 순간들’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당신의 인생에서 아름다운 장면, 행복했던 장면 하나를 들려주세요. 그 순간이 있어 당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게 하는 환한 이야기면 됩니다.” 나눔에 참여한 사람들은 ‘내 생애 아름다운 순간이 언제일까?’ 저마다 지나온 삶의 필름을 되돌려보다가 평소에 무심코 그냥 지나치던 삶의 순간들이 가슴속으로 깊이 들어와서 큰 기쁨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각자 마음에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웠던 순간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대부분 소박하고 작은 일이었다.

“양가 부모님 도움 없이 시작한 소박하고 단출했던 신혼 때,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레던 그때의 추억”, “대학교 때 포천 산골학교로 봉사활동을 가서 아이들과 놀며 그림 그리기, 학교 도로 포장하기 등을 하고 떠나오는 날, 아이들이 편지를 주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을 때”, “중학교 때 물감 살 돈이 없어 칼라 물감을 사지 못하고, 먹물에 풀을 섞어 데칼코마니를 했을 때 창의적이라고 선생님께 칭찬받았던 것”, “생일날 야근하고 돌아왔는데 작은 케이크와 카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을 때….”

당면한 현실의 무게가 버거워 삶이 팍팍하거나 정서가 점점 메말라갈 때 주위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래에 이루고 싶은 꿈 한 장면을 나누는 것도 좋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릴 만한 게 별로 없다면 인생을 너무 삭막하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윤필교 (기록문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