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손병호] 권력자들의 절제된 만남
입력 2013-06-02 19:16 수정 2013-06-02 23:02
화창한 춘삼월 오후, 궐문이 열리더니 왕을 태운 가마가 행차에 나섰다. 어가 뒤로 왕비와 왕세자 부부, 공주와 부마까지 따랐다. 일행이 당도한 곳은 한수 이북의 풍광 좋은 배나무골.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대 최고의 거상이 사는 곳이었다. 왕은 거상의 안내로 골동품들을 둘러봤고, 사랑채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왕이 다녀간 뒤 저잣거리는 물론, 관가에서도 다시금 확인된 거상의 높은 위상이 두고두고 회자됐다.
2005년 3월 13일 일요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개인 일정’으로 서울 이태원동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을 방문했다. 부인 권양숙 여사, 아들 건호씨 부부, 딸 정연씨 부부를 동반했다. 대통령 일행은 이 회장 집 옆의 ‘리움’을 찾아 이 회장 부부의 안내로 미술품을 관람했고, 이후 관장실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리움은 이 회장의 영문 성(Lee)과 뮤지움(Museum)을 합성한 것이다. 당시 청와대는 이 방문을 ‘비공식 문화생활’이라 설명했지만, 정치권에서는 노무현 정부와 삼성 그룹 간의 ‘각별한 관계’를 얘기할 때 자주 거론하는 장면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한 인사는 최근 기자와 만나 “재벌 또는 대기업 사람들을 가급적 만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이유를 물으니 “자꾸 만나면 그쪽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쪽 사정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해되기 시작하면 결국 그쪽의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침묵하게 되더라”라고 덧붙였다.
권력자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누군가는 권력자에게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만남에서는 아무래도 “당신의 권력을 사회 전체를 위해 써 달라”는 부탁보다는 “그 권력을 나를 위해 써 달라”는 요청이 오갈 것이다. 영향을 미쳤는지와 별개로 ‘만남’과 ‘초청’, ‘방문’ 자체가 발휘하는 상징적 힘도 크다. 때문에 권력 주변에선 ‘만남’을 성사시키려는 물밑 로비가 치열하다.
국회는 언젠가부터 대기업 임원들의 ‘상시 출입처’가 됐다. 국회의원이나 보좌관들이나 국회 상임위 소속 국회 입법조사관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출입에는 ‘목적’이 있다. 기업의 손익이 달린 입법과 관련해 입장을 전달하거나, 국회 상임위 활동과 관련해 기업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매년 가을 국정감사 시즌에 대기업 대표들의 증인 출석을 막아내는 로비는 지금은 ‘애교’에 불과해서 더는 문제도 안 된다.
이런 때문인지 다수 국회의원들의 하루 일정과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공식 일정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시간이 ‘조직된 힘’이 있고, ‘돈’이 있고, 국회에 영향을 미칠 만한 ‘유력자 네크워크’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할애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청와대나 다른 행정부, 법조계나 사정당국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추정된다.
만남 자체가 나쁘지도 않고, 재벌이나 유력자들이라고 해서 만나지 말란 법도 없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일정’과 ‘만남’이 과도하게 힘 있는 사람과 조직에게 쏠리면서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그들만의 리그’로 치달아온 측면이 있다. 권력자들의 ‘만남’이 편중되면 ‘만남 밖의 사람들’의 목소리에 둔감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편중되게 만난 그룹의 방패막이가 돼 있는 권력자들도 종종 봐왔다. 권력자들이 만남을 다양화하고 특정 그룹과의 과도한 만남을 자제하는 일, 그것이 어쩌면 공정사회를 만들어가고 갑을(甲乙) 관계를 바로잡는 시발점일 것이다.
손병호 정치부 차장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