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3부)] ‘터널 속 암흑’ 1시간 체험… 시각장애 편견을 깨다

입력 2013-06-02 17:31


‘어둠 속의 대화’ 獨 프랑크푸르트 박물관 르포

눈을 감은 뒤에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조금도 빛이 새어들지 않는 세상을 한 시간 동안 헤맨 뒤 나는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지난 3월 2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심가에 위치한 ‘어둠 속의 대화(Dialog im Dunkeln)’ 박물관을 찾았다. 비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의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일상생활을 재현한 곳이다.

입장하기 전 시각장애인용 지팡이 사용법을 간략히 배웠다. 오른손의 지팡이로 앞길을 확인하면서 왼손으로는 벽을 짚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등 뒤 빛의 세계를 떠나 암흑으로 접어들었다.

빛의 부재 속에 눈을 떠도 감아도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고 느껴졌다. 시각장애인인 안내인의 영어 지시를 따르며 조금씩 나아갔다. “앞쪽에 얕은 오르막이 있어요.” 안내인의 말과 함께 첫 도전과제가 나타났다. 하지만 평지를 걸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긴장감이 엄습했다. 앞발과 뒷발이 딛는 높이가 달라 무릎이 펴지기 전에 발이 땅에 닿으며 중심 잡기가 어려웠다.

“제 목소리를 듣고 제가 있는 곳으로 오세요.” 안내인의 목소리를 따라 반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문이 열리면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왼손을 뻗어 벽을 짚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세요.” 딸깍 문이 열렸고 50m로 느껴지는 5m 정도를 지나가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내인은 “난간 너머로 손을 뻗어 무엇이 느껴지는지 말해보세요”라고 말했다. 손을 뻗는 순간 차가운 느낌이 전해져 화들짝 손을 뺐다. 차가운 물이었다. “물이 만져지네요”라고 답하자 안내인은 “그것 말고 또 무엇이 느껴지나요”라며 재차 물었다. 다시 손을 뻗으니 벽체를 타고 물이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손끝에 집중을 하니 울퉁불퉁한 바위 표면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 구역의 안내인은 벽에 기대고 서라고 한 뒤 우리를 바닥에 앉혔다. “마음과 귀를 열고 소리에 집중하세요.” 바닥에 앉으니 극도의 긴장감이 누그러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노랫소리와 새소리, 동물의 울음소리가 지나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정신이 내 마음 안쪽으로 집중됐다.

다음 문 뒤쪽은 도심지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코스였다. 안내인이 문을 열자 자동차 달리는 소리와 경적 소리가 귀를 울렸다. 딸깍딸깍 소리가 나는 장애인용 신호기가 있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안내인은 “신호가 길게 울리기 시작하면 길을 건너라”고 말했다. 이후 안내인의 목소리는 도시의 소음에 묻혔다. 일행의 가장 뒤쪽에 서 있었던 데다 소음성 난청이 있는 나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차량의 굉음과 인도와 차도의 경계석의 높이 차이 탓에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돼버렸다. 안내인의 손을 잡고서야 겨우 다음 코스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윽고 안내인은 우리를 카페로 이끌었다. 피곤할 테니 목이나 축이고 가잔다. 실제로 돈을 내고 음료를 사 마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카운터에 서니 종업원이 반갑게 인사하며 “뭘 드시겠어요”라고 물었다.

생수를 주문하니 1유로20센트를 내란다. 아뿔싸 동전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줘야 하는데 100유로(약 14만원)짜리를 잘못 꺼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것 같았다. 감촉으로는 지폐를 구별할 능력이 없으니 얼마를 거슬러주든 그냥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가장 크기가 작은 돈을 골라서 종업원에게 건넸다. “아 너무너무 큰 돈을 주셔서 저희가 이것을 받을 수 없네요”하며 종업원이 깔깔 웃는다. 그리고는 받았던 돈을 다시 내게 돌려줬다. 뭐가 잘못 됐을까. 다른 지폐를 꺼내 건넸더니 종업원은 “5유로 받았습니다”하며 동전 몇 개를 건넸다. 생수 한 병을 손에 쥐어주면서 “지폐의 액면가를 식별하는 기계가 있어 갖다 대면 얼마인지 알려줘요”라고 말했다.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로 옮겨 엉덩이를 붙이고 앉기까지가 쉽지 않았다. 발밑을 체크하는 데 겨우 익숙해진 지팡이 솜씨로는 허리 높이의 테이블에 부딪히는 것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자리를 잡고 목을 축이는데 안내인이 “오늘 어땠어요”라고 물었다. 일행은 “너무너무 어려웠어요. 시각장애인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물을 다 마시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인의 지시에 따라 또다시 벽을 짚고 움직였다. 문 앞에 이르니 안내인이 “이 문을 나가 저 모퉁이를 돌면 빛의 세계로 나가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벽을 짚고 오른쪽, 다시 왼쪽으로 모퉁이를 돌자 희미하게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출구가 보였다. 안도감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는 의욕이 솟구쳤다. 기나긴 터널을 지난 것 같은 홀가분한 느낌과 동시에 입학식 날 설레던 기분이 떠올랐다.

출구에서 안경과 옷가지를 챙기며 지갑을 꺼내 열어보니 환전하고 남아 꽂아놨던 5000원짜리 한국 돈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어둠 속의 카페에서 내가 내밀었던 ‘너무 너무 큰 돈’의 정체였다. 그러나 어둠 속의 대화 박물관에서 느낀 것은 그야말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경험이었다.

프랑크푸르트=선정수 기자 j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