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⑬ 창조경제형 사회적기업
입력 2013-06-02 17:21 수정 2013-06-02 22:48
유방암 촉진 전문가로 양성 ‘디스커버링 핸즈’
가슴 위에서 네 손가락이 왈츠를 춘다. 양손의 검지와 중지가 차례로 손가락 폭만큼 이동하고는 지그시 눌러 돌리며 우아한 삼박자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시각장애인 검진 전문가는 30분 동안 환자의 가슴을 세심히 진단했다. 환자의 양쪽 겨드랑이 아랫부분과 양쪽 유두를 지나가는 수직선, 가슴골에 1㎝ 간격으로 표시된 점자 구간 식별 테이프를 붙인 뒤 검진을 시작했다.
◇유방암을 찾아내는 네 손가락 왈츠=사회적기업 디스커버링 핸즈(Discovering Hands)의 대표 프랑크 호프만 박사는 산부인과 의사다. 그는 강화된 건강보험 적용 때문에 환자들이 유방암 초기 검진 기회를 놓치는 것이 못마땅했다. 2년에 한 번씩 건강보험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유방암 X선 검진 적용 연령이 2005년부터 40세에서 50세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호프만 박사는 지난 3월 28일 언론진흥기금 후원으로 방문한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0세 이하 여성은 스스로 종양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잘할 수 있도록 만들까를 생각하다가 불현듯 누가 잘할 수 있을지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번뜩 시각장애인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은 볼 수는 없지만 스스로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촉각이 유달리 발달돼 있다. 비장애인이 읽지 못하는 점자를 시각장애인은 읽을 수 있다.
이런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시각장애인 한명을 고용해 시범사업을 진행할까 했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러다 노동청의 장애인 담당 직원을 만나 계기를 얻게 됐다. 그의 아이디어를 직업훈련으로 발전시켜 보면 어떠냐는 제의를 받게 된 것이다. 전문가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지만 여전히 실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아소카재단에서 연락이 왔다. 아소카재단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적기업가를 후원하는 기금으로 이 재단의 독일 지부가 호프만 박사의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이 재단은 굴지의 컨설팅 회사 맥킨지의 컨설팅은 물론 각종 법적 조언과 재능기부자들을 연결시켜줬다.
이렇게 디스커버링 핸즈가 태어나게 됐다. 이 회사는 시각장애인을 선발해 교육·훈련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촉진용 점자 테이프를 만들어 보급하는 일을 담당한다.
◇장애가 오히려 재능으로=현재 20명 안팎의 시각장애인 유방암 촉진 전문가가 독일 내 17개 병원에서 진료를 돕고 있다. 환자는 일단 의사와 상담한 뒤 시각장애인 전문가의 촉진을 받게 된다. 보통 산부인과 의사들의 촉진 시간은 길어야 3분 정도로 짧지만 이들은 환자에 따라 최장 60분 정도를 투여한다. 고도로 발달된 촉각에 집중적인 교육이 더해져 이들이 발견할 수 있는 종양의 최소 크기는 0.6∼0.8㎝에 이른다. 보통 산부인과 의사들이 1∼2㎝ 정도, 일반인들은 2.5㎝ 이상일 때에야 종양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능력이다.
점자 구간 식별 테이프를 따라 손가락이 움직이기 때문에 이상징후가 발견되면 시각장애인 전문가들은 해당 구역의 번호를 의사에게 통보하게 된다. 전문가의 촉각을 통해 환자의 가슴이 바둑판 모양의 구역으로 나눠 입력되는 셈이다.
종양이 2㎝ 이하일 때 발견되면 10년 후 생존율은 90%이다. 그만큼 조기 발견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시각장애인 전문가가 발견할 수 있는 최소 단계에서 발견되면 의사가 발견할 때보다 사회적 비용도 5만7000유로(약 8300만원)를 절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각장애인들이 그동안 장애로 여겼던 보이지 않는 것을 재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각장애인 유방암 촉진 전문가 프라우 폴씨는 “유방암 촉진 전문가 활동을 하기 전에는 장애로 인해 우울증 등 여러 문제에 시달렸다”며 “하지만 지금은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뿌듯하다”고 말했다.
촉진 전문가가 받는 월급은 숙련도에 따라 1300∼2000유로(약 189만∼290만원) 정도다. 시각장애인을 고용하면 첫 3년 동안은 정부에서 고용보조금을 지원해준다. 첫해는 70%를 지원하고 다음 해엔 60%, 마지막 해에는 50%를 지원한다.
◇한국 등 세계 진출 희망=시각장애인 촉진 전문가가 되려면 직업 훈련기관에서 상세한 자격요건을 검증받아야 한다. 촉각이 뛰어나야 하고 소통능력과 사회성, 학습능력과 인지능력이 발달해야 한다.
디스커버링 핸즈는 올해 10월 독일어권 국가인 이웃 오스트리아에도 진출할 예정이다. 호프만 박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세계 한 귀퉁이를 좀 더 좋게 만들고 있다는 삶의 의미가 느껴져 가장 좋다”면서 활짝 웃었다.
한국에서 디스커버링 핸즈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도와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생각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디스커버링 핸즈 한국 지부를 만들도록 하겠다”며 “가장 먼저 독일어로 된 프로그램을 번역하고 다른 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사람을 독일로 초빙해 훈련을 시킨 뒤 한국에 돌아가 훈련을 맡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뮐하임=선정수 기자 jsun@kmib.co.kr
■도움 주신 분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프랑크 호프만 디스커버링 핸즈 CEO ▲클라라 클레츠카 어둠 속의 대화 프랑크푸르트 박물관 CEO ▲남용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팀장 ▲이상화 독일외환은행 법인장, 강숙 과장 ▲박수진 프라이대학교 한국어학과 강사 ▲정인순 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