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돈세탁 온상’ 버진 아일랜드] 부자들의 ‘유령 금고’로
입력 2013-06-01 04:03 수정 2013-05-31 10:52
부자들의 재산 은닉처로 연일 입방아에 오르는 버진 아일랜드는 원래 휴양지로 유명한 섬들로 이뤄져 있다. 청량한 옥색 하늘에 젖빛 구름이 잔물결처럼 흐르고, 유리거울 같은 수면이 그 풍경을 담고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찰랑거리는 경치가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져 있다. 잔잔한 바다 위를 한가롭게 떠다니는 백색의 요트들, 대리석을 갈아 뿌려놓은 듯한 해변, 빗자루 같은 초록 잎사귀를 허공으로 뿜어 올린 야자수, 그 너머로 엷은 구름 그림자가 차근차근 훑고 넘어가는 녹색 언덕.
여름 한낮 기온이 26∼31도를 유지하고 겨울밤에도 22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 속 편한 섬이 어쩌다 부자들의 비밀 금고가 된 것일까. 또 그 많은 검은 돈은 어디에 묻혀 있단 말인가.
◇처녀 섬의 ‘속살’=버진 제도라고도 부르는 버진 아일랜드는 160여개의 화산섬과 암초로 이뤄져 있다. 막상 섬이라고 할 만한 곳은 절반인 80여개로 전체 면적이 497㎢다. 남한 면적(9만9720㎢)의 0.5%가 안 되고 그마저도 대부분 무인도다. 미국과 영국이 동서로 나눠 가진 이 섬들은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서인도 제도에 둘러싸인 카리브해의 동부에 떠 있다. 인구는 약 13만7000명이다.
서양사에서 버진 아일랜드에 첫발을 디딘 사람은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탁자 위에 달걀을 세웠다는 그가 이 섬에 도달한 건 1493년 제2차 항해 때였다. 콜럼버스는 배 17척에 1500명을 태우고 첫 항해에서 발견한 지금의 아이티 섬과 쿠바 등에 금을 캐러 가다 버진 아일랜드를 발견했다. 그가 인도의 서쪽인 줄 알았던 탓에 이름이 잘못 붙은 서인도 제도 일대에는 아이티와 쿠바 말고도 섬이 많아 이 섬, 저 섬 헤매다가 버진 아일랜드에까지 온 것이다. 처녀 섬이란 뜻의 이름 버진 아일랜드(Virgin Islands)는 그때 붙여졌다.
◇열강의 ‘손때’가 묻다=콜럼버스가 왔을 때 버진 아일랜드에는 공격적이고 사람을 먹기도 한다는 카리브족이 살고 있었다. 남아메리카 북쪽에서 발원한 종족이다. 항해를 잘하는 이들은 스페인보다 먼저 카리브해 섬들로 진출해 원주민인 아라와크족을 차례로 전멸시켰다. 버진 아일랜드에 원래 살던 아라와크족도 이때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된다. 카리브족은 유럽인들이 몰려오면서 소멸됐다.
버진 아일랜드는 스페인이 자기 땅이라고 못 박은 1500년대 중반부터 열강의 손때가 묻는다. 스페인은 얼마 후 무적함대가 영국에 무참히 깨지면서 기세가 꺾인다. 영국은 1672년 토르톨라 섬을 비롯한 동쪽 섬들을 점령했고, 미국은 주요 노예시장이면서 사탕수수 생산 중심지였던 세인트크루아 섬 등 서쪽 섬들을 1917년 덴마크로부터 사들였다. 지금의 주민은 80∼90%가 과거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의 후손이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인종 물라토도 많다.
◇보물섬으로 태어나다=버진 아일랜드는 1883년 출간된 소설 ‘보물섬’의 배경으로 유력하게 거론된다. 보물섬은 해적에게서 보물 지도를 얻은 소년이 모험을 떠나면서 우여곡절을 겪는 이야기다.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내놓기 전에 쓴 이 책 한 권으로 벼락 스타가 됐다.
실제로 버진 아일랜드는 유럽 각국이 앞 다퉈 바다에 배를 띄우던 15∼17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그 이후까지 해적의 은신처로 쓰였다고 한다. 버진 아일랜드의 한 섬인 노먼 아일랜드에는 해적이 보물을 숨겼었다는 동굴이 아직 남아 있다. 주민들도 이 섬을 보물섬이라고 부른다.
소설 보물섬에 나오는 노래 제목 ‘망자의 함’(Dead Man’s Chest)이 버진 아일랜드에 속한 바위섬의 이름과 같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섬의 이름은 조니뎁이 주정뱅이 해적 선장으로 나오는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 2편의 부제로도 쓰였다.
◇‘유령’이 터를 잡다=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폭로로 화제가 된 곳은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다. 미국령보다 적은 영국령 섬은 36곳(151㎢) 정도로 그중 16곳에만 사람이 산다. 3만20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인구는 75%가 38㎢ 면적의 토르톨라 섬에 밀집해 있다. 이런 버진 아일랜드에 등록된 기업이 80만개가 넘는다. 5층짜리 건물 하나에 1만8000개 기업이 입주한 경우도 있다. 죄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 직원도, 사무실도 없는 페이퍼컴퍼니(종이회사)다.
페이퍼컴퍼니는 주로 기업 인수·합병이나 역외펀드(제3국에 조성되는 주식투자기금) 관리, 해외 부동산 투자 등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졌다가 목적이 달성되면 해체된다. 이 자체는 합법이지만 버진 아일랜드의 페이퍼컴퍼니는 기업·부자들의 탈세나 자금 세탁 수단으로 이용된 혐의가 짙다. 특히 우리나라는 10억원 넘는 금융자산을 하루라도 해외 금융계좌에 넣었다면 자진신고를 해야 한다. 이 제도가 도입된 지난 2년간 버진 아일랜드에서는 신고가 1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탈세의 낙원=부자들이 버진 아일랜드에 유령 회사를 세우거나 금융계좌를 만드는 이유는 세금을 안 내기 위해서다. 법인세가 대표적이다. 한국 등 대부분 국가에서 기업은 이익의 최대 20∼4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본국인 영국도 최대 23.25%를 떼지만 1967년 자치권을 인정받은 버진 아일랜드는 1.9%까지만 받는다. 사탕수수 재배와 목축, 럼주(酒) 수출 등으로 먹고살던 버진 아일랜드에는 1980년 초부터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었고 관광업과 함께 금융업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했다.
버진 아일랜드처럼 세금을 안 내도 되는 지역을 조세 피난처(Tax Haven)라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0년 35곳의 세금 천국을 골라 발표했었다. 온난화로 가라앉는 섬 투발루를 비롯해 버뮤다, 바하마, 몰디브, 서사모아 등 상당수가 물 좋기로 소문난 섬나라였다. 이들 지역은 세제 혜택이 많고, 기업 경영과 외국환 관리에 대한 규제는 적다. 금융거래는 익명성이 보장된다.
◇숨겨둔 돈은 어디에=버진 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나 금융계좌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러시아 부총리의 아내, 몽골 전 재무장관, 필리핀 전 대통령의 딸, 태국 전 공보장관, 프랑스 대통령의 대선캠프 재무 담당관, 그루지야 총리 등이었다. 국내에서는 인터넷 매체 ‘뉴스타파’가 ICIJ로부터 자료를 받아 한국인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ICIJ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숨겨진 자산 규모가 21조∼32조 달러 수준일 것으로 본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가 넘는다. 지난 1월 국제 시민단체 ‘조세정의 네트워크’는 197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에서 조세피난처로 넘어간 자산을 7790억 달러(약 880조원)로 추정했다. 중국 1조1890억 달러, 러시아 7980억 달러에 이어 세계 세 번째 규모다. 사실이라면 이런 거액이 빠져나가도록 국세청과 관세청은 뭘 했다는 건지. 매달 월급을 받기도 전에 세금부터 강제로 꼬박꼬박 떼이는 직장인으로선 복장이 터질 수밖에 없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