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미술관장으로 사는 법

입력 2013-05-31 18:03


“은행에서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 미술관을 담보로 제시했지만 직업이 없다는 게 대출 거부 이유라네요? 미술관장도 엄연한 직업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돼요. 큐레이터와 직원 등 6명에게 월급도 주고 있는데 말이죠.”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북한강변에 위치한 가일미술관의 강건국(68) 관장이 최근 털어놓은 하소연이다.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출신인 강 관장은 지역 주민들에게 그림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수도권 문화예술의 명소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갖고 2003년 5월 미술관을 개관했다. 매일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뜻으로 가일(嘉日)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5년 정도 운영하면 정상 궤도에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각종 기획전을 열었다. 전시장 옆에 공연장을 만들어 토요일에는 음악회도 개최했다. 미술관 관람료는 어린이 2500원, 일반 3000원이지만 휴일을 빼면 관람객이 거의 없다. 음악회 입장료는 1만원이지만 연주자 출연료를 빼면 남는 게 없다. 그러다 보니 개관 10주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적자상태다.

국공립 전시장은 무료인데 이곳은 왜 돈을 받느냐며 항의하는 관람객도 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실시된 국공립 박물관·미술관의 상설 전시장 무료 관람 때문이다. 화랑 또는 갤러리는 공짜인데 같은 그림 전시회를 여는 미술관에서는 왜 입장료를 받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다.

갤러리나 화랑은 전시를 통해 그림을 파는 상업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무료입장이고, 미술관은 그림 판매를 하지 않고 관람료로 운영되기 때문에 입장료를 받는다고 설명하면 일부 관람객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아예 발길을 돌려버린다.

미술관은 운영 주체에 따라 국공립 미술관과 사립미술관으로 나뉜다. 국공립 미술관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기 때문에 여건이 비교적 안정적이다. 물론 미술품 구입비 등을 유럽이나 미국 등 해외 국공립 미술관에 비교하면 부끄러운 수준이기는 하다. 사립미술관은 가일미술관처럼 개인이 건립한 것, 환기미술관처럼 작가를 조명하기 위한 것, 삼성리움미술관처럼 기업에서 운영하는 것 등이 있다.

국공립 미술관장은 능력을 인정받은 미술계 인사가 맡는 게 보통이고, 사립미술관 가운데 개인 미술관은 설립자가 맡으며, 기업 미술관은 재벌 총수의 부인 등 가족이 주로 맡는다. 개인 미술관에 대한 국가 및 지자체의 지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연간 1억여원의 운영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강 관장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미술관 옆에 카페를 차렸으나 주말에만 손님이 몰려들고 평일에는 한산하다. 카페 역시 적자가 늘어나 할 수 없이 은행을 찾게 된 것이다. 하지만 평소 미술관에 들러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는 은행 직원은 미술관장이라는 신분으로는 신용을 담보할 수 없어 대출이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강 관장은 “사재를 털어 미술관을 지었는데 지금 와서 문을 닫을 수도 없고 큰일”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림이 기업의 비자금 마련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갤러리나 미술관이 그 온상으로 비쳐지는 현실을 보면 기가 막힌다. 서미갤러리 등 일부 화랑의 문제가 전체 미술계로 확산되는 듯해 자존심마저 상한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미술인들도 많은데 전체가 도매금으로 인식되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오랫동안 친분을 가져왔던 미술애호가들도 요즘 미술관에 발길을 뚝 끊어버렸어요. 그림과 비자금 커넥션이 연일 보도되니 몸을 사리는 거지요. 미술관장으로 사는 게 이토록 힘들 줄 정말 몰랐습니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