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진통겪은 아랍권… 이번엔 과거청산 진통
입력 2013-05-30 18:40 수정 2013-05-30 22:17
모하메드 알 메가리프(72) 리비아 제헌의회 의장은 지난 28일(현지시간)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 “국민의 대표자들이 뜻을 표했고 이는 마땅히 존중돼야 한다”면서 “내가 제일 먼저 당신들의 손에 사직서를 쥐어주겠다”고 말했다. 중도 이슬람 성향의 야권 유력 지도자인 메가리프 의장은 과거 무아마르 카다피 독재 정권에 반대해 1980년대부터 망명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망명 전 인도 주재 대사 등 공직을 맡은 것이 문제가 돼 사임했다.
그는 독재 정권 부역자들을 공직에서 배제하는 ‘정치적 고립법(Political Isolation Law)’이 이달 초 통과된 후 처음 사임한 공직자다. 그러나 부역자를 처단하는 이 법이 지역 안정과 인권에 반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는 이 법이 리비아 임시헌법과 국제 인권 의무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중동·북아프리카 담당자인 사라 리흐는 “법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카다피 정권 42년간 일한 모든 공직자를 배제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법안 처리 과정도 문제였다. 이달 초 외무부와 법무부 등이 특정 정치 성향의 민병대원들에게 포위된 채 법안이 날치기 통과됐다. ‘정치적 고립법’ 제정 과정에서 법적 검토는 없었다. 부역자를 가리기 위한 위원회가 설립됐다.
리비아의 과거 청산 방식이 중동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혁명 또는 쿠데타 등으로 정권 교체를 한 중동 국가에서 주로 이런 방식이 적용됐다. 이 법안은 특히 이라크의 ‘탈바트화법(de-Baathification law)’을 복제했다고 사우디아라비아 일간 아랍뉴스는 지적했다. 2003년 5월 제정된 탈바트화법은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 당시의 부역자를 청산하는 것으로,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인정 하에 제정됐다.
그러나 탈바트화법은 시행 1년 만인 2004년 6월 폐지됐다. 이 법으로 후세인 정권과 결탁했던 수니파 무슬림 사회에 대한 전반적 고립과 종교적 분열이 조장됐기 때문이다. 당시 법 시행으로 5만∼10만명의 교사, 공공 의료진, 공무원 등이 축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탈바트화법을 지지했던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도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축출한 이후 이라크 정계에서 바트당을 한꺼번에 몰아내려고 했던 일은 특히 유감스럽다”며 “우리는 ‘탈바트화’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했어야 했다”고 인정했다. 이라크 전역에서 이달에만 테러로 5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현재까지도 수니파와 시아파 간 종파 분쟁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
이라크뿐 아니라 2011년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축출한 이집트에도 비슷한 조치가 취해졌으며 튀니지에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사우디아라비아 일간 아샤크 알 아우사트는 보도했다. 대신 전반적인 소급 입법으로 과거를 청산하는 것보다 학살 등의 범죄에 가담한 부역자를 특정해 기소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다고 신문은 제안했다. 특정 정치 또는 종교 세력의 고립이 증가할수록 새 정권의 필요조건인 안정이 저해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과거 청산 또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칼럼니스트 알리 이브라힘은 이렇게 지적했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