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행복은 왜 공허한가

입력 2013-05-30 17:45


행복 스트레스/탁석산/창비

가히 행복 전성시대다. 행복은 일찌감치 자기 계발의 주류 담론으로 자리 잡아왔지만 올 들어 유독 행복을 제목에 넣은 책들이 쏟아진다. 현 정부는 ‘국민행복시대’를 기치로 내걸었다. ‘행복한 표정의 주부’ 모델을 내세운 TV 광고는 “이걸 소비하세요. 당신도 행복해질 테니까”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쯤 되면 행복은 시대적 강요다.

저자인 철학자 탁석산은 이런 식으로 자신도 모르게 강요당하는 행복강박증을 ‘행복 스트레스’로 개념화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종교처럼 떠받드는 행복이 사실 텅 빈 개념일 수 있고, 우리 인생을 헛수고로 끝나게 하는 헛된 개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행복론 뒤집기 작업은 우선 행복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그것이 어떻게 현대인을 지배하는 세속종교가 됐는지 등 행복의 역사를 살피는 데서 출발한다.

행복이라는 말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1789)에서 주장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나왔다. 18세기 후반에나 탄생한 개념인 것이다. 이는 ‘신은 죽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가 근대사회를 지배하면서 신의 자리를 차지한 대표적 키워드가 됐다.

특히 공리주의에서 탄생한 행복은 서양사상의 근본인 개인주의 시장주의 민주주의와 함께 더욱 공고화된다. 민주주의가 행복론을 강화한다는 대목에서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 있겠다. 이는 민주주의의 평등 개념과 관련이 있다. 혈통 중심의 귀족이 사라진 시대에 사람들은 남과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한 수단으로 명품가방, 돈, 학력 등의 끝없는 행복 추구에 나선다는 것이다. 유교적 덕목이 중시되던 동양사회에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1868)을 거치면서 서양문화 유입과 함께 행복 개념은 전파됐다.

그런데 행복 추구가 왜 문제일까.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해결하려는 것에 근본적 해악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회적 구제를 요청하는 대신 개인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경향을 낳는다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멘토 책들이 다 이런 식의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꼬집기도 한다.

행복의 포로가 된 우리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나는 불행한 것이 아닐까 되묻는 우리들에게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예컨대, 피라미드형 위계질서보다 원탁형 관계를 추구하라, 개인의 이익 추구 대신 공동의 부(富) 정신을 가지라고 제안한다.

저자는 이런 반응을 예견한 듯 “공동의 부라는 개념도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과격하고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다”면서 그걸 현실화한 구체적인 예를 제시한다. 집에는 책이 별로 없어도 동네 도서관에 가면 구하지 못할 책이 없는 환경, 그런 게 공동의 부라는 것이다.

“이제 ‘행복’ 대신 ‘좋은 삶’을 추구하라.” 행복 스트레스에 지친 당신에게 저자가 내놓은 대안이다. 이게 어느 정도의 울림을 가질지는 고민의 깊이에 달려있을 것 같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