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1세대 엇갈린 운명과 사랑… 임재희 첫 장편소설 ‘당신의 파라다이스’
입력 2013-05-30 17:52
1902년 12월 22일, 일본 배 겐카이마루 호는 하와이로 향하는 조선인 첫 이민자 121명을 태우고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다. 12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 검역소에서 신체검사를 한 결과 19명이 탈락해 귀국하고 102명이 호놀룰루에 도착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하와이 주립대학 출신의 소설가 임재희(50·사진)의 첫 장편 ‘당신의 파라다이스’(도서출판 나무옆의자)는 하와이의 첫 조선인 이주민들과 결혼하기 위해 똑같은 코스를 경유해 호놀룰루에 도착한 열여덟 살 강희의 삶을 따라가는 유장한 디아스포라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제물포에서 중신아비가 강희를 비롯한 다섯 명의 처자에게 보여준 건 장차 남편감이 될 하와이 이주 조선인 청년들의 사진이었다. “나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세 번째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정면을 바라보는 다른 사진들과는 달리 자연스러운 옆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방금 빗질을 끝낸 것처럼 빗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머리칼은 정갈해 보였다. 기름 바른 듯 부드러워 보이는 머릿결이 인상적이었다.”(37쪽)
강희는 제물포에서 친자매처럼 자란 나영과 함께 하와이에 도착, 미리 점찍어 둔 남편감들과 첫 대면한다. 하지만 나영이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 최상학과의 결혼을 거부한 채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강희는 하는 수없이 최상학과 혼례를 올리는 대신 원래 강희의 짝이었던 조선인 청년 창석은 나영과 살림을 차리게 된다.
작가는 이 뒤바뀐 운명의 장난을 섬세하고도 탄탄한 문체로 직조해 낸다. “부엌이라고 하기엔 엉성하기 짝이 없는 지붕과 벽이 약간 실망스러웠다. 나는 부엌 흙바닥을 발로 문질러보았다. 붉은 빛이 도는 흙이 참 신기했다. 물기라고는 전혀 없어 호 하고 불면 붉은 먼지가 일 것 같았다. 포와에 가면 부엌 바닥이고 변소고 신발을 신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는 말은 누구 입에서 처음 나왔던 것일까.”(43쪽)
소설은 강희와 상학, 나영과 창석의 엇갈린 운명에 색채감 짙은 러브 라인이 추가되면서 마치 파파야가 익어가는 듯한 열대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이화여고를 졸업한 1985년에 하와이로 이민 간 작가가 나라 잃은 설움에 인종차별까지 겪으면서 어렵사리 이국 땅에서 삶의 터전을 일군 하와이 한인 1세대의 역경과 꿈을 원고지 1200장 분량의 소설로 복원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한국이민소설의 새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임재희는 “이 소설은 한 시대를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살다간 사람들에 대한 내 애도의 한 방식”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흑백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들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물을 것만 같아요. ‘당신의 파라다이스는 어디쯤에 있습니까?’ 나는 낙원을 향해 가는 긴 여정 자체가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