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60년前 피의 격전지 올라 “희생 헛되지 않았다”

입력 2013-05-29 18:31 수정 2013-05-29 22:15


남색 정장을 맞춰 입고 태극기와 프랑스 국기가 나란히 새겨진 배지를 왼쪽 옷깃에 단 프랑스 참전용사 11명이 강원도 양구 중동부전선 최전방 ‘단장(斷腸)의 능선’ 프랑스참전비 앞에 섰다. 휠체어에 앉거나 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선 60년 세월이 느껴졌지만, 함께 방한한 가족들에게 젊은 날의 무용담을 말하는 표정에선 자부심이 느껴졌다.

안개비가 내린 29일 오전 6·25전쟁 당시 유엔군 일원으로 한국에 왔던 프랑스 참전용사 11명과 가족 등 18명이 단장의 능선 전투 기념식을 가졌다. 2007년 시작돼 여섯 번째를 맞이한 이 추모행사는 올해 정전 60주년이란 의미가 더해져 더욱 뜻 깊은 행사가 됐다.

단장의 능선은 프랑스군이 미군과 함께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30만발의 대규모 포 사격과 항공 근접지원으로 북한군을 격퇴했던 곳이다. 당시 전쟁 상황을 취재하던 AP통신 스탠 카터 기자가 전장에 투입된 부상병이 “가슴이 찢어진다(Heart Breaking)”고 부르짖는 것을 듣고 ‘단장의 능선 전투’라 이름 붙여 보도한 데서 유래했다.

오전 11시쯤 프랑스 국방무관 주앙 대령의 사회로 기념식이 시작됐다. 해발 931m에 세워진 프랑스참전비 앞에서 프랑스 국가가 울려 퍼졌다. 참전용사들은 국가를 부르며 60여년 전을 회상했다. 프랑스참전용사협의회 패트릭 보두앙 회장은 “1950년 프랑스는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이곳에 군대를 보냈다”며 “단장의 능선 전투는 프랑스군에도 의미 있는, 상징적인 전투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보두앙 회장은 또 “이곳에 와보니 고지를 지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엄청난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을 보며 참전용사들 모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전했다.

단장의 능선 전투는 미군 1900여명, 프랑스군 42명, 한국군 5명이 전사한 매우 치열했던 전투다. 21사단은 프랑스 대대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2007년 8월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를, 2010년 5월 기념관을 설치했다. 참전비에는 ‘자유를 위하여’라고 적었다.

이들은 기념비에 헌화하고 손을 들어 경례했다. 이후 기념관을 둘러보며 당시를 회고했다. 벙커를 고쳐 만든 기념관에는 백발 노병들이 참전 당시 사용했던 전투복과 수통, 전투 장면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돼 있었다.

1951년 9월 26일 프랑스군 제2중대장으로 참전했던 구필 대위는 고지 공격을 지휘하다 적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그가 전사했던 지점엔 세워진 위령비 앞에서 참전용사들은 헌화하고 묵념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피에르 르그리(80)씨는 “한국전 당시 18세로 프랑스 대대에선 내가 최연소였다”면서 “당시 너무나 참혹했고 산악지형에 경사가 매우 심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는 “오히려 중공군과는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했고 북한군은 무척 잔인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수천구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민간인들까지 도왔던 아주 치열한 전투였다”고 했다. 피에르씨는 “60년 전에는 이 가파른 언덕을 뛰어다녔는데 세월이 많이 흐른 것을 실감한다”며 웃었다.

이들이 고국에서 가져온 부대기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받은 ‘대통령 단체 표창’도 달려 있었다. 프랑스군은 1952년 11월 18일과 1953년 10월 13일 두 차례 표창을 받았다. 이번 기념식에는 프랑스 대대와 함께 참전했던 박문준(83), 이병선(80), 박동하(82)씨도 참석했다. 박동하씨는 “당시 부대를 지휘했던 장군과 전우들을 기억한다. 세월은 오래 흘렀지만 전우애가 느껴진다”고 소감을 밝혔다.

프랑스는 6·25전쟁 당시 해병대, 파리경비대, 공수부대 출신 등으로 구성된 지상군 3421명을 한국에 보냈다. 프랑스군은 단장의 능선 전투, 인제 전투, 지평리 전투 등에서 262명이 전사했고 1008명이 부상했다.

양구=김미나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