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넘어 함께하는 우리로 (22)] 여성·소외이웃 품었던 ‘광주의 어머니’
입력 2013-05-29 17:33
YWCA 인물산책 ‘길을 따라서’-조아라
한 알의 밀알이 죽어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했던가! 광주YWCA 역사 90여년의 열매에도 어김없이 하나의 밀알이 있으니 바로 그가 조아라다. 광주YWCA회관 2층에는 조금 특별한 곳이 있는데 바로 조아라를 기념하는 방이다. 2003년 소천한 뒤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생필품, 기록 등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데 하나하나 정갈하고 빈틈없었던 그의 삶을 짐작하게 한다. 호는 소심당(素心堂),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구속자와 부상자를 일일이 찾아 보살피는 것을 보고 그의 열정과 진실한 인품에 감복한 동양화단의 원로 의재 허백련이 티없이 결백하다는 뜻으로 지어준 아호다. 하지만 조아라는 ‘광주의 어머니’로 더 유명하다. 이는 한국 여성 민주화운동의 대모, 광주에서 희생과 자애로 한결같이 여성들과 불우이웃들을 품었던 그의 삶을 대변해준다.
조아라는 1912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교회와 사설 학원을 세워 기독교 신앙에 투철한 삶을 살았던 기독교 장로의 딸로 태어나 광주 지역 여성 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의 본거지요 1922년 광주YWCA를 태동시킨 김필례가 교사로 재직하던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했으니 어쩌면 조아라와 광주YWCA의 만남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하고 이일학교 교사로 있던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백인청년단사건 주동자로 연루돼 1년간 옥고를 치르고 교직에서도 강제 해직됐다. 또 36년 수피아여학교가 신사참배·창씨개명을 거부해 폐교될 때는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검거돼 다시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인회를 출범시키는 한편 독립촉성부인회 광주전남 총무를 맡아 활동했다.
YWCA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45년 광복되던 해에 시작됐다. 광주YWCA는 22년 창립 후 16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38년에 폐쇄를 결단했다. 표면상으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의해 YWCA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수피아여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서 YWCA 참여 회원이 급격히 감소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지만 실상은 일본 YWCA와의 합병보다는 저항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광복 후 한 달 남짓 9월 14일, 금동 금정교회 부속 유치원에서 조아라 등의 발의로 광주YWCA 재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됨에 따라 광주YWCA의 두 번째 시대가 열리게 된다. 특히 그 자리에서는 이후 광주YWCA운동이 지향해야 할 바를 정하는 중요한 결정이 있었는데, 즉 여성의 올바른 애국운동, 건전한 기독교 생활화운동, 여성의 자질 향상을 위한 교육운동, 민주정치 안정을 위한 여성의 행정 및 의정 참여운동 등으로, 이는 이후 전개될 역사와 민족에 대한 책임적 존재로서의 광주YWCA 여성들의 활약의 원동력이 됐다.
재건 때 상무이사로 시작해 47년부터 72년까지 26년간 광주YWCA 총무, 73∼76년과 79∼83년 두 번의 광주YWCA 회장, 이후 광주YWCA 명예회장, 2003년 92세로 소천하기까지 조아라의 YWCA 사랑은 한 사람의 열정과 헌신이 한 YWCA를 민족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체로 성장시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지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여성운동가 조아라와 함께 광주YWCA는 광주 지역 여성운동의 중심이 됐다. 지방 최초 가정법률상담소 개소(66년), 신용협동조합 결성(71년), 농촌사업 그리고 소비자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선도적인 여성시민운동체로 발전케 했다.
또 사회운동가 조아라의 열정은 광주YWCA로 하여금 호남여숙과 성빈여사 설립(52년), 별빛학교 개설(61년), 계명여사 설립(62년) 등 사회 부조리와 소외된 이웃의 참된 친구가 되는 사회복지 사업의 선구자로 우뚝 서게 했다.
12대 회장으로 재임하던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돼 전국에 민주화운동이 고조될 당시 조아라 회장은 그해 10월 매주 목요일 광주YWCA 강당에서 광주YMCA, 광주NCC 그리고 전남자유수호위원회 등과 연합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된 수감자들을 위한 목요기도회를 시작했다. 광주YWCA가 사회 불의에 항거, 민주화에 동참하는 민중기독운동으로 각인된 단초였다.
14대 회장 때는 광주민주화항쟁의 소용돌이에서 양심적 재야 명망가를 중심으로 한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아라는 92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린 남북 여성 토론회에 한국 여성계 대표로 참석했고, 그밖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업추진회, 광주 국제사면위원회, 국민운동 전남본부, 21세기 여성발전위원회, 광주여성정치연맹 등의 고문을 지냈다.
평생을 봉사에 몸바쳐온 만큼 많은 상을 받았는데 광주시민대상(1988), 정일형자유민주상(1998), 무등여성대상(1998)에 이어 YWCA 전국대회 대상을 받았고 소천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김기동(한국YWCA연합회 실행위원)
◇소심당 고 조아라 장로 약력
1912. 3. 28 나주군 대안리에서 6남매 중 차녀로 출생
1945. 9. 14 광주YWCA 재건 참여, 상무이사로 봉직
1947∼1973 광주YWCA 총무로 26년간 시무
1959. 7 대의동에 광주YWCA회관 건립
1973∼1983 광주YWCA 회장 역임
1980. 5 5·18광주 민주화운동 시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 6개월간 옥고
1987 이후 5·18 광주민주항쟁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 광주 앰네스티와 국민운동 전남본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