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의 바다’ 그곳에 가고 싶다

입력 2013-05-29 17:10 수정 2013-05-29 17:43


‘바다의 날’ 행사 열리는 태안의 매력

태안의 바다와 해변은 상상이 현실이 되는 색도화지다. 황금색 도화지를 초록색 잎과 분홍색 꽃으로 채색하면 해당화 만발한 신두리 사구가 완성되고, 붉은색 도화지에 데이트하는 연인을 스케치하면 석양에 물든 만리포해안으로 거듭난다. 어디 그뿐인가. 초록색 도화지에 조개 줍는 체험객들을 그리면 파래로 뒤덮인 꽃지해변으로 변하고, 검은색 도화지에 불 밝힌 텐트를 그리면 한밤에 몽산포해변 솔밭에서 캠핑을 즐기는 가족들의 정다운 모습을 만나게 된다.

바다에도 품격이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넓은 백사장, 그리고 붉은 해당화가 시심을 자극하는 충남 태안의 바다는 한 폭의 풍경화이자 한 편의 서정시이다. 수평선을 수놓은 119개의 크고 작은 섬은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저마다 애틋한 전설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내고, 가없는 하늘과 바다를 붉게 채색하는 석양은 연인들의 가슴처럼 붉다.

들쭉날쭉한 리아스식 해안에 32개의 크고 작은 해수욕장을 품고 있는 태안의 해안선은 무려 531㎞. 청정바다로 유명한 이 해안에 한때 검은 재앙이 덮쳤다. 2007년 12월 7일 오전 7시6분. 높은 파도와 강풍으로 예인줄이 절단돼 표류하던 크레인선이 원유 운반선인 허베이 스피리트호를 들이받았다. 원유탱크에 구멍이 뚫리면서 검은 원유가 폭포수처럼 바다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태안을 비롯한 서해안이 대재앙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한겨울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130만명에 이르는 자원봉사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닦아도 닦아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기름 찌꺼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민들의 가슴에 새겨진 생채기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지만 검은 파도에 유린됐던 바다는 푸른색을 되찾았고 검은 백사장도 금빛과 은빛으로 반짝이며 ‘만리포 사랑’을 노래한다.

그로부터 5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검은 재앙의 직격탄을 맞았던 신두리해변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모래언덕에는 철새 따라 가버린 총각 선생을 그리워하는 섬처녀 마음처럼 붉은 해당화가 곱게 피었다. ‘한국의 사막’으로 불리는 신두리 사구는 우리나라 최대의 해안사구로 길이 3.4㎞에 폭 500m∼1.3㎞로 면적은 서울 여의도보다 조금 넓은 98만㎡.

파도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신두리해변에 쌓여 사빈으로 불리는 모래해안을 형성하고, 사빈의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는 겨울철 초속 17m가 넘는 강한 바람에 날려가다 쌓여 모래언덕을 형성했다. 그렇게 쌓이고 날아오고 또 쌓이고 날아오기를 1만5000년째. 모래언덕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바람의 흔적인 물결무늬가 선명하다.

태안에는 그림 같은 해안선을 따라 걷는 ‘태안 해변길’이 조성돼 있다. 솔모랫길, 노을길, 솔향기길, 태배길 등 구간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숨겨진 태안의 보석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학암포해변에서 출발해 신두리해변과 천리포해변을 꿈결처럼 걸어온 태안 해변길은 제18회 ‘바다의 날’ 주행사장인 만리포해변에서 잠시 쉼표를 찍는다.

길이가 만리라서 만리포라 불린 것일까. 조선시대에 명나라로 가는 사신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전별식을 가졌다는 만리포해변은 대천, 변산과 함께 서해안의 3대 해변으로 꼽힌다. 가요 ‘만리포 사랑’의 무대인 만리포해변은 ‘누가 검은 바다를 손잡고 마주 서서 생명을 살렸는가’라는 제목의 시비가 아니면 기름 유출의 기억마저 아득하다. 연인과 가족들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빨간 등대를 배경으로 해변에 발자국을 새기는 모습이 정겹다.

태안의 솔밭 중 몽산포해변의 솔밭만큼 아름답고 넓은 지역은 없다. 오는 8월 중순에서 10월 초 사이에 ‘태안 캠핑 페스티벌’이 열리는 몽산포해변의 솔밭은 길이 9㎞에 면적이 50만㎡나 되는 오토캠핑장으로 급수대와 화장실을 포함해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사계절 캠핑객들로 북적거린다. 차량을 포함해 동시에 설치할 수 있는 텐트는 3750동.

몽산포해변은 낮보다 밤이 더 황홀하다. 바다가 어둠 속으로 침잠하고 별빛과 달빛이 솔가지 사이로 스며들면 형형색색의 텐트가 앞다퉈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가족끼리 이야기꽃을 나누거나 물 빠진 갯벌에서 횃불이나 랜턴을 들고 조개나 물고기를 잡는 해루질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 시원한 바닷바람을 자장가 삼아 해먹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다보면 어느새 몽산포의 황홀한 아침이 찾아온다.

변산 채석강·강화 석모도와 함께 서해안 3대 낙조 명소로 손꼽히는 꽃지해변은 해변을 따라 해당화가 많이 피어 ‘화지(花池)’로 불리던 곳으로 두 개의 바위섬 사이로 지는 낙조가 일품이다. 최근에는 미국의 뉴스전문채널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곳’ 중 2위를 차지한 곳으로 하루 두 차례 물이 빠지면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주변의 해변은 굴이나 조개를 캐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로 불리는 바위섬은 해상왕 장보고의 부하 승언 장군이 전쟁터에 나간 후 돌아오지 않자 아내 미도가 일편단심 기다리다 죽어 망부석이 됐다는 순애보의 전설이 전해오는 곳. 붉게 채색된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의 실루엣이 돋보이는 꽃지해변 낙조는 거친 질감의 유화를 연상시킨다. 포구로 돌아오던 어선 한 척이 반쯤 가라앉은 해 속에 갇히고 갈매기들이 무시로 해 속을 드나드는 풍경은 꽃지해변의 상징.

안면도에는 진흙 속의 진주처럼 알려지지 않은 곳도 있다. 샛별해변 옆에 위치한 병술만 어촌체험마을이 바로 그곳. 병술만은 고려의 삼별초가 전남 진도로 가기 전에 수개월 주둔했던 곳으로 ‘병술(兵術)’은 군사훈련장을 뜻한다.

소나무 숲길 사이로 난 비포장도로를 덜컹덜컹 달리면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 드라마 ‘선덕여왕’과 ‘김수로왕’ 촬영세트장이 생경한 모습으로 반긴다. 마을 수변데크에서 경운기를 타고 갯벌을 달리면 곳곳이 바지락, 소라, 고동 등을 채취할 수 있는 갯벌체험장. 자욱한 해무 사이로 언뜻언뜻 나신을 드러내는 섬들이 태안 바다의 품격을 더한다.

태안=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