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정원교] 베이징에서 당한 굴욕
입력 2013-05-28 17:41
24일 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최룡해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또다시 군복 차림이었다. 고려항공 특별기 트랩을 내려오는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은 최룡해 특사 일행의 이번 중국 방문을 ‘베이징에서 당한 굴욕’이라고 표현했다.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북한)이 ‘한반도 비핵화’(중국)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국면이 이렇게 전개될 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일까.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최룡해 특사가 첫날부터 군복 차림을 고수하자 “이번 특사 방중이 순탄하게 진행되기는 힘들겠구나”라는 관측이 대두됐다.
군복이 “경제와 핵무기 둘 다 포기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읽혔기 때문이다. 최 특사가 24일 오후 애간장을 태우던 끝에 간신히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면서 군복을 벗은 것은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한다.
최 특사는 ‘관련국과 대화’(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 면담)에서 ‘6자회담 등 대화’(시 주석 면담)로 물러섰지만 기존의 논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즉 경제 건설을 강조하면서 ‘평화로운 외부 환경 조성’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침략 의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핵무장이 불가피하다는, 그동안 되풀이해 온 주장이다.
하지만 북한 핵을 둘러싼 중국 측 대응은 단호했다. 최 특사가 만난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 판창룽(范長龍)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시 주석은 차례로 중국의 ‘한반도 정책 3원칙’ 가운데 ‘비핵화’를 최우선 순위에 올렸다.
중국은 지금까지 ‘한반도 평화와 안정’ 다음에 ‘비핵화’와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 순서로 3원칙을 열거해 왔다. 지난해 12월 장거리 로켓 발사 뒤 5개월 넘게 제어가 불가능한 행동을 계속한 북한을 보면서 중국이 태도를 바꾼 것이다.
더욱이 왕자루이(王家瑞)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장(중련부장)이 중국을 방문한 한국 의원단을 만나 “중국과 북한은 일반 국가 관계”라고 밝힌 것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북한과 더 이상 혈맹 관계가 아니라는 얘기다.
사실 중국 내 북한 전문가들은 올 들어 이러한 견해를 공공연히 밝혀 왔다. 중국 명문대 교수들이나 국책연구소 연구원 중에는 대북 정책 전환을 촉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은 중국-베트남 관계를 예로 들기도 한다. 중국이 과거 사회주의를 ‘수출’하고 원조도 제공했던 혈맹 베트남이 지금은 중국과 영토 분쟁을 벌이는 불편한 상대가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북한도 베트남처럼 중국에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한다.
왕 중련부장의 발언은 무게감에서 이들 전문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중련부는 외국과 당 대 당 외교를 담당한다. 그는 2003년 3월부터 10년 넘게 중련부장을 맡아왔다.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거치면서 또다시 현직에 유임됐다. 그런 만큼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부터 북한 노동당과의 교류를 최일선에서 다뤄온 산증인이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한반도 정세 변화의 조짐으로 볼 수 있다.
곧 이임하는 이규형 주중대사는 이와 관련해 “중국은 지금 북한보다는 한국과 공유하는 가치가 훨씬 더 많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중국인들이 ‘한국과 관계를 넓혀나가는 것이 중국에 이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게 다행”이라고도 했다. 다음달 말로 예정된 박근혜 대통령 방중의 의미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베이징=정원교 특파원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