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름엔 흰색·검정색 눈 여겨 보세요”

입력 2013-05-28 18:20


‘佛 국가공로훈장 기사장’ 받은 디자이너 문영희 씨의 코디 제안

“노라노 선생님이 직접 와서 축하해주셨어요. 진태옥 선생님은 이렇게 멋진 축하카드를 보내오셨구요.”

이달 초 국내 패션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국가공로훈장(문화 예술부문) 기사장을 받은 문영희씨는 수상의 기쁨보다 수상을 축하해준 선배들에 대한 고마움이 더 큰 듯했다.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입구에 자리한 ‘문영희’의 서울 매장에서 지난 23일 그를 만났다. 올여름 패션의 유행경향을 듣기 위해서였지만 훈장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받은 훈장은 외국인에게 주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으로, 프랑스와 출신국의 문화 예술 교류 공헌도, 창작력, 공익성 등을 몇 해에 걸쳐 꼼꼼히 따져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씨는 “지난해 프랑스 정부에서 ‘너희 나라에서 대통령 훈장을 받았느냐’고 물어 와서 ‘안 받았다’고 했더니 의아해 하더라”면서 하하 웃었다.

그는 1975년 ‘문부티크’를 설립, 당시에는 낯설었던 캐주얼을 선보여 80년대 패션시장을 주름잡았다. 1벌에 1800달러짜리 옷을 80여벌 수출해 상공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1벌에 1달러짜리 셔츠를 수출하던 때였다. 잘 나가던 그는 1996년 돌연 국내사업을 접고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패션의 도시 파리에서 오로지 창작에만 열중하고 싶었어요. 또 자신도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가위와 바늘을 잡은 그였다. 문학적인 감수성과 ‘패션의 언어’를 익히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불문학을 전공했기에 언어 문제도 없었다. 주변에선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했다. 그는 에둘러가지 않고 직진을 택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파리 패션계는 돈으로 되는 세계가 아니었다. 무대장치, 조명, 음악, 메이크업, 헤어, 홍보 등 컬렉션 관련 스태프는 물론 모델도 제대로 구할 수가 없었다. 능력 있는 이들은 동양에서 온 작은 디자이너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 5년쯤 지났을 때 ‘당신이랑 작업해보고 싶다’며 찾아오더군요. 디자이너가 아닌 창작자(크레아트리스)로 인정받은 것이지요.”

이후 그는 원단도 필요한 만큼 특별 주문하면 일류 직물회사에서 제작해주는 등 나름 특권을 누리고 있다. 파리 패션계는 ‘크레아트리스 문영희’를 ‘디자인에서 건축미가 느껴지고, 선이 신선하며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나에게 젖어 있는 우리 문화와 한복이 창작에 표출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이대 대학원 의상학과를 다니면서 우리 옷을 시대별로 연구했다는 그는 “한복이나 한글을 디자인의 원천으로 삼을 때는 철학적인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글이나 한복의 선을 직설적으로 프린트하고 재인용한다면 파리 패션계는 넌센스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넌지시 귀띔했다.

그는 해외 진출을 꿈꾸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는 “자기 것을 찾아서 확실할 때 나가라”고 조언했다. 슬쩍슬쩍 유명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차용하고 베껴선 바이어들은 물론 수십 년 패션을 담당한 전문기자들의 ‘매의 눈’을 절대 피해갈 수 없다는 것. 서울컬렉션을 5대 컬렉션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관계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컬렉션 문화를 정립할 것을 주문했다.

“컬렉션은 작품을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연예인들이 주인공이 되는 자리는 절대 아니지요.”

최근 연예인을 앞세운 디자이너들의 마케팅을 꼬집은 그는 “사람 사귀는 재주도 없고, 내 자랑도 잘못하니 창작력과 근성만 있으면 인정받을 수 있는 파리가 서울보다 쉬운 것 같다”고 했다.

파리의 디자이너로 남겠다는 그에게 올여름 유행경향을 물었다.

“흰색과 검정색을 눈 여겨 보세요. 또, 면 마 등 천연 소재가 사랑받을 것 같습니다.”

그는 흰색 옷을 즐기고 싶다면 소재에 따른 텍스처와 색감의 차이를 활용한 묘미를 즐겨보라고 권했다. 흰색 면과 흰색 마는 그 느낌이 다르고, 같은 면이라도 표백한 것과 안 한 것과 차이가 난다는 것. 그는 서로 다른 소재와 색감으로 면을 분할한 블로킹 디자인을 추천했다. 흰색을 바탕으로 감색이나 벽돌색 등을 널찍한 면으로 집어넣어 액센트를 주는 것도 시도해볼만하다고. 또, 얇은 면 셔츠 위에 코듀로이처럼 직조한 면 조끼를 겹쳐 입는 스타일링을 활용하면 멋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트렌드 소개가 두루뭉술한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하하 웃는다. 국내 디자이너들은 트렌드를 너무 좁게 제시하고, 또 사람들은 그것을 무작정 좇다보니 개성 없는 차림들이 된다고 아쉬워했다.

“내적인 아름다움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멋쟁이가 되고 싶다면 박물관과 화랑, 클래식 음악회 등을 다니며 문화적 감수성을 키우세요.”

그는 서울거리에선 고가의 유명브랜드를 입었는데도 느낌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특히 날씬하고 예쁜 것만 좇는 것은 잘못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