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15) 할아버지와 아버지 순교로 이룬 ‘5代 목회자 가문’
입력 2013-05-28 17:25
지난해 손자(박범 목사)가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우리 집안이 ‘한국교회 최초의 5대 목회자 가정’으로 소개됐다. 문득 70여년 전 아버지(박경구 목사)가 편지로 건네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는 목사 집안이다. 너는 대를 이어 목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순교 소식을 구체적으로 들은 건 장신대 학장이 된 직후였다. 1983년 봄 어느 날, 한경직 목사님이 나더러 미국 애틀랜타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김영혁 박사를 만나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관련된 얘기라고 하시기에 그해 여름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김 박사는 아버지 얘기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아버지와 동향(황해도 장연) 출신인 그는 6·25 전쟁 직후 월남해 미 8군에서 노무자 감독으로 일하던 때였다고 한다. 당시 동향 출신의 노무자 중 한 명이 있었는데, 그가 해주 감옥에서 아버지 순교현장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김 박사는 그와 함께 고향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 순교 목격담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고난의 길을 자초하셨다. 교회 탄압이 심해지자, 친지들이 “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해도 아버지는 “내 양(성도)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진격 명령이 떨어진 그날 새벽, 인민군 소속 내무서원 몇 명이 주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러 교회 예배당에 오신 아버지를 체포해 해주 감옥으로 이송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몸이 찢기고 손·발가락이 부러지도록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남으로 진격하던 인민군이 퇴각할 때는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을 모두 사살하고 떠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 해주 감옥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민군들은 아버지의 손과 발을 칼로 토막을 내 죽였는데, 그날이 1950년 10월 15일이었다고 한다.
꼭 100년 전인 1913년, 한국 최초의 중국 선교사였던 할아버지(박태로 목사)와 고난 가운데 순교하신 아버지 뒤를 이어 내가 목사가 된 것.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들(4대)과 손자(5대)까지 목사의 길을 가게 된 데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4월 17일,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서울 광장동 장신대 세계교회협력센터에서 예장통합 교단 평북노회 임직식이 있었다. 이 자리는 우리 집안에 5대 목회자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날 아들(박호진 목사)은 “인간의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목회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손자인 박범 목사는 “신앙의 좋은 전통을 전수해 준 가정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이날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아버지는 1949년 9월 13일 나에게 보내준 엽서를 끝으로 연락이 두절됐다. 아버지는 나의 장래를 걱정하시는 동시에 미래를 축복해 주시면서 엽서 말미에 가훈 얘기를 언급하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다는 가훈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직접 우리집 가훈을 다시 만들어 자녀들과 가정에 전해 주었다. 내가 화선지에 먹으로 쓴 가훈이 액자로 만들어져 손녀 집에 걸려있는 것을 봤을 때 흐뭇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계셨다면 얼마나 기특해하셨을까. 우리집 가훈을 소개한다.
‘성삼위 하나님만 믿고 섬기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 앞에 기쁨을 주자.’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