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터뷰] 한·일 근대사 연구에 헌신 진보적 학자… 기미지마 가즈히코 교수
입력 2013-05-28 17:36 수정 2013-05-28 15:10
“日 역사왜곡 본질은 불충분한 패전처리에 있다”
“침략에 대한 정의(定義)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국가와 국가 간 관계에서는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미국 대통령이 그곳(알링턴묘지)에 가듯 일본 총리로서 나도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하는 것이다.” 아베 신조(安部晋三) 총리의 발언이다.
“성노예인지 아닌지는 국제사회의 평가에 달렸다. 각국 군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같은 방식으로 여성을 이용했는데 일본만 비판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위안부는 필요했다.”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오사카시장도 아베 총리에 질세라 연일 망언을 늘어놓고 있다.
올 들어 일본 보수우익 정치지도자들의 망언행보가 점입가경이다. 이에 대해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을 비롯해 미국, 유엔 등 세계가 일제히 문제를 제기하자 말꼬리를 슬그머니 돌리며 발뺌하는 모습이지만 역사왜곡발언에 대한 정정은 없었다. 대체 왜 이럴까. 이와 관련해 한일역사교육문제의 권위자인 기미지마 가즈히코(君島和彦) 도쿄학예대 명예교수(전 서울대 교수)에게 일본 역사왜곡의 근원문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22일 약 두 시간에 걸쳐 국제전화로 이뤄졌다.
만난 사람=조용래 논설위원
아베 총리, 하시모토 시장, 이시하라 신타로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아소 다로 부총리 등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역사왜곡 발언 사태가 반복적으로 거듭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이에 기미지마 교수는 “이 문제는 긴 눈으로 봐야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근본 원인은 일본의 전후처리, 즉 패전처리가 말끔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데 있다고 본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樞軸國)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인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전쟁지도자, 즉 최대의 책임자가 패전 후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모두 죽었지만 일본의 경우 대부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전쟁책임자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후 독일이 전쟁책임 추궁에 열심이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이는 히틀러를 비롯한 최고의 전쟁책임자들이 살아남지 못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반면 일본은 천황을 비롯해 전쟁의 주모자들이 그대로 건재했다. 일본의 전쟁책임 추궁과 관련해서는 도쿄전범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1946년 5월∼1948년 11월)을 통해 이른바 ‘A급 전범’도 등장하게 됐으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이들의 역할은 천황에게 전쟁책임이 제기되지 않도록 하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었음이 확인된다.”
1946년 봄 쇼와천황은 측근 가신들을 불러 모아 이른바 ‘쇼와천황 독백록’을 작성하는데 그 내용은, 1931년 만주사변에서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자신(천황)은 시종 평화주의의 입장을 고수했으나 군의 요청을 물리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개전에 이르게 됐다는 등의 변명 일색이다. 기미지마 교수는 “‘쇼와천황 독백록’ 역시 천황의 면책을 위한 작업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그와 같은 상황을 방치한 것인가.
“도쿄재판에서 주도권은 미국이 쥐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다른 연합국과 달리 천황에 대한 면책이 점령정책 수행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이후 도쿄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해 종결시키는 한편 ‘상징천황’의 존재를 용인한 새 헌법(1947년 5월 시행)을 재빠르게 만들도록 했다.”
-일본의 패전 직후 제대로 전쟁책임 추궁이 안 된 탓에 작금의 역사왜곡이 빚어졌다면 해결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
“근본적인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일본의 세습의원들 문제다. 보수정치가들 가운데 2, 3세 세습의원들이 많은데 이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전쟁책임 연관자라면 쉽사리 과거의 전쟁을 침략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아니겠나. 예컨대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A급 전범으로 체포됐다가 도쿄재판이 빨리 종료되는 바람에 1948년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기시는 만주침략의 중심인물이며 전쟁 중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이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침략에 대한 정의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도쿄재판의 근거는 그에 앞서 벌어진 뉘른베르크재판(국제군사재판)에서 거론된 ‘평화에 대한 죄’다. 물론 2차대전 이전에 마련된 게 아니고 패전 후에 만들어진 근거이므로 반대론자들은 이점을 들어 비판하지만 침략의 정의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유엔총회는 1974년 ‘결의 3314호’에서 ‘침략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주권, 영토보전 혹은 정치적 독립에 대해 무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주장은 전후 국제질서를 부인하는 것 아닌가.
“아베와 자민당의 사고회로 체계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앞에서는 ‘미·일동맹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과거의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아베 총리 등이 21세기 들어 부쩍 과거옹호론을 펴는 까닭은 무엇인가.
“최근에야 새삼스럽게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일본의 보수우익은 전후 꾸준히 망언을 해왔다.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때조차도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도움이 됐다는 주장이 나왔었다. 다만 최근 들어 망언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역사왜곡 발언에 대한 제어가 약화된 탓이다. 전에는 역사왜곡 발언을 한 각료는 사퇴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요즘엔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일본 국내의 매스컴과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비판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또 그런 억지 발언을 하나’ 하면서 무시해 버리려는 분위기가 결과적으로 망언을 해도 적당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것 같다. 계속된 망언에 우리 스스로가 마비돼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기미지마 교수는 “역사왜곡을 일삼는 이들은 수위조절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게 아니냐”며 크게 우려했다. 그간 우리의 대응도 그의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겠다.
-알링턴 국립묘지와 야스쿠니신사는 어떻게 다른가.
“우선 야스쿠니신사의 특징만 살펴봐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에는 신사가 많이 있으나 야스쿠니신사는 일반 신사와 전혀 다르다. 전전에는 야스쿠니신사를 관리하는 주체가 육군성과 해군성이었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는 메이지유신 이후의 전쟁(주로 침략전쟁)에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신으로 모신 곳이다.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현장인 것이다.”
-A급 전범이 봉안돼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인가.
“앞서 말한 대로 전쟁책임 추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점, 즉 천황이 그대로 상징천황이란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천황을 위한 침략전쟁, 그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높이 기리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혈육이 야스쿠니신사에 봉안돼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침략과 전쟁을 긍정하고 찬미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야스쿠니 참배를 옹호하는 일본 우익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란 말을 앞세우는데 이때 거론하는 ‘국가’가 무엇을 뜻하느냐는 매우 중요하겠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야스쿠니신사와 천황은 깊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전쟁책임을 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후예가 2, 3세 세습의원으로 일본정치를 좌우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본질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역사왜곡 발언은 쉬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다면 인도(人道)에 관한 사안이라고 할 수 있는 구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를 담은 ‘고노담화’를 1993년 발표하고 1995년 민간 중심의 구 위안부 생활지원을 명목으로 ‘아시아 여성기금’을 발족했으나(2007년 해산)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배상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비판이 쇄도했다.
-아시아 여성기금은 민간기금으로 출범했지만 실제론 일본 정부의 자금이 적지 않게 들어 있었는데, 왜 당시 일본은 그런 방식을 썼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모든 배상이 마무리됐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관련 입법 및 그에 입각한 배상을 회피했다. 어차피 정부가 돈을 지출할 것이라면 솔직하게 문제를 풀었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의 또 다른 책임회피였다.”
-해결의 기회를 놓친 탓인지 위안부의 존재를 아예 부인하는 주장까지 나온다.
“고노담화에 앞서 위안부 운영 등에 군이 직접 관여했다는 당시 자료가 확인된 바 있다. 다만 강제성의 여부는 아직까지 자료로서 확인은 안 됐지만 명백한 증인이 있는 상황이 아닌가.”
-위안부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할머니들이 계속해서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좀 더 융통성 있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면 위안부 문제는 일찌감치 해결됐을 것이다. 국가배상이 끝났다면
개인배상 차원으로 접근을 달리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여기에 한번 결정된 것은 한사코 바꾸지 않으려고 하는 일본의 융통성 없는 관료주의가 개입되면서 문제가 어렵게 됐다. 적어도 아베 정권 하에서는 어려울 것 같다.”
기미지마 교수는 2008년 7월 24일자 아사히신문 기고문 ‘다케시마(일본의 독도 호칭) 문제를 교육의 장으로 떠넘기지 말라’에서 중학교용 학습지도요령해설서에 처음으로 독도 문제가 제기된 것과 관련해 정치적·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교육의 현장에 떠넘기지 말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기고문에서 “정치적으로 영토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아베 총리의 일본평화헌법 개정 문제 등과 관련해 일본의 역사학자와 시민들의 역할이 궁금했다. 아베 총리 지지율은 계속된 역사왜곡 발언에도 불구하고 70% 선을 오르내릴 정도로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다시 군국주의로 치닫는 것인가.
“아베 총리 등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군국주의적 내용이 가득하다. 헌법 개정에 대해 전쟁포기 등 평화조항을 폐기하는 것은 물론 상징천황을 국가의 원수로 떠받드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 물론 쉽게 관철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위험성에 대해 비판을 계속해야 한다.”
-아베 총리는 2015년 전후 70년을 기념하는 ‘아베담화’를 내놓겠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아베 정권이 계속될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베담화’가 나오면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걱정이다. 이
런 문제인식을 공유하는 양국의 교류가 더욱 필요하다.”
조용래 논설위원 hoyr@kmib.co.kr
■ 기미지마 교수는
일본근현대사 및 한국근대사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진보적인 역사학자로 일본과 한국의 역사교육·교과서 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쏟아왔다. 그는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교수가 교과서검정 불합격 판정에 대해 ‘표현의 자유’와 ‘검열금지’ 등을 보장한 헌법에 위배된다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이른바 ‘이에나가 교과서재판’(1·2·3차 소송은 각각 1993년, 89년, 97년 최종심에서 패소 및 일부 승소)과 관련해 70년부터 ‘이에나가교과서소송을 지원하는 역사학 관계자모임’의 사무국 활동을 계속했으며, 일본의 교과서왜곡에 반대하는 시민운동단체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의 대표위원을 역임했다.
기미지마 교수는 한일공동역사교과서 운동에도 열심이다. 도쿄학예대학과 서울시립대학 연구팀은 10여년 동안 이어온 ‘한일역사교과서 심포지엄’의 결실로서 2007년 ‘한일역사공통교재-한일교류의 역사’를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간행했는데 기미지마 교수는 일본 측 사무국장으로 활약했다. ‘한일교류의 역사’는 선사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대상으로 한 첫 한·일 공통의 ‘통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다.
그는 2009년부터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정교수로 부임해 2010년 정년을 맞았다. 이후 1년 동안 같은 과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 도쿄교육대 및 동대학원 석·박사과정 수료, 현 도쿄학예대 명예교수, 저서로 ‘교과서의 사상-일본과 한국의 근현대사’ ‘일한역사교과서의 궤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