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탈출’ 이일희 “나도 챔프다”

입력 2013-05-27 19:15 수정 2013-05-27 22:39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아무도 앞일을 알 수 없는 법이다. 큰 뜻을 품고 떠난 미국무대. 별 소득이 없어 한국무대로 돌아오려 했지만 시드전 탈락. 배수의 진을 치고 다시 도전한 미국무대에서 이일희(25·볼빅)은 4년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27일(이하 한국시간) 바하마 파라다이스 아일랜드의 오션 클럽 골프장에서 12홀로 치러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퓨어실크-바하마 클래식 마지막날 3라운드. 비바람 속에서도 5타를 줄여 최종 합계 11언더파 126타로 정상에 오른 이일희는 “어머니가 제일 보고싶다”는 말로 우승 소감을 밝혔다. 올 시즌 치러진 LPGA 투어 11개 대회에서 한국낭자들이 거둔 성적은 박인비의 3승을 포함해 신지애(미래에셋), 이일희까지 5승째다.

2006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 데뷔한 이일희는 국내무대에서도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2008년 우리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 2009년 MBC 투어 제2회 롯데마트 오픈에서 두 차례 준우승한 것이 최고성적이었다. 마지막 순간 고비를 넘지 못하고 주저앉은 탓이다.

큰 무대 진출이 꿈이었던 이일희는 2009년 퀄리파잉스쿨에서 20위에 올라 2010년부터 LPGA 대회에 출전했다. 치밀한 준비없이 “한번 부딪혀보자”고 나선 미국무대도 당연히 녹록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동갑내기 절친 신지애의 도움을 받았지만 홀로서기에 나선 후로는 투어 비용을 감당 못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숙소는 대회장 근처 무료 민박을 이용했고, 동료들의 차를 얻어 타며 이동했다.세계랭킹도 62위에 불과한 이일희는 자식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플까 봐 어떤 환경에서든 밝고 씩씩하게 행동하려는 속 깊은 효녀이기도 하다. 2년간 고생에도 이렇다할 성적이 없자 2011년 12월 한국에 돌아오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KLPGA 투어 시드전에서 탈락하면서 어쩔 수 없이 미국무대에 남게 됐다.

이 때 후원사가 나타났다. 이일희는 국산 골프볼 업체인 볼빅과 후원계약을 하면서 대회 비용과 집이 생겼다. 정신적 여유가 생긴 그는 2012년 US여자오픈 4위, 에비앙 마스터스에서 공동 9위를 차지하며 자신감도 붙었다. 올 들어서는 지난 6일 끝난 킹스밀 챔피언십에서 공동 3위에 올라 첫 승의 기대감을 부풀렸다.

마침내 폭우로 하루 12홀씩 사흘간 36홀의 미니 대회로 치러진 이번 대회에서 어렵사리 찾아온 우승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선두에 3타 뒤진 공동 5위로 3라운드를 시작한 이일희는 1∼3번홀 연속 버디로 공동선두로 올라섰다. 8번홀(파4)에서 다시 버디를 추가, 단독 선두로 나선 이일희는 11번홀(파4)의 위기를 파로 잘 막고 마지막 12번홀(파5)에서 버디를 추가, 첫 승을 완성했다. 이날 7타를 줄여 단독 2위에 오른 재미교포 아이린 조(29)에 2타 앞선 완승이었다.

우승상금 19만5000달러(약 2억1600만원)를 챙긴 이일희는 올 시즌 30만9000달러를 벌어들여 시즌 상금 랭킹 37위에서 12위로 수직상승했다. 그간의 미국 생활이 생각나 목이 멘 이일희는 “큰 무대에서 뛰어 보겠다는 생각만으로 미국 무대에 진출했는데 우승하고 나니 자꾸 눈물이 난다”며 울먹였다.

서완석 국장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