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처용, 청바지 입고 압구정동에 떴다
입력 2013-05-26 17:15 수정 2013-05-26 10:27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 깊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도다/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 인고/ 본래 내 것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통일신라시대 말기 향가 ‘처용가’다. 처용이 아내의 외도를 눈앞에서 보고도 체념하고 용서한다는 내용이다. 통일신라시대 처용이 2013년 서울 압구정동에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다면 어떨까?
국립오페라단의 창작오페라 ‘처용’은 이런 발상에서 시작됐다. 100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새롭게 태어난 ‘처용’이 6월 8∼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려진다.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처용설화=연출은 양정웅(45)이 맡았다. 국립오페라단의 ‘천생연분’(2006) ‘보체크’(2007), 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2007) 등을 통해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정서를 담아내 호평을 받은 인물이다.
처용설화의 배경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통일신라 말 49대 헌강왕(875∼886) 시대.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시대 신라는 기와집이 즐비하고 매일 음악이 끊이지 않아 안정기라 불렸다. 양 연출가는 “달리 해석해보면 귀족과 왕족들이 부를 축적하며 향락을 즐길 때 일반 서민들의 삶은 궁핍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신라 부유층을 황금을 숭배했지만 스스로 황금의 감옥에 갇혀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들로 본 것이다.
그가 구현하는 오페라 ‘처용’은 배경이 신라이지만, 현대적으로 재해석됐다. 흥청망청한 신라 말기의 시대상을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 투영시킨 것. 처용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세계로 내려온 옥황상제의 아들로 그려진다. 그는 “오페라 ‘처용’은 우리 역사가 신라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길 바라는 처용의 아리아이며 파멸의 뒤안길로 가지 말자는 기도의 합창”이라고 정의했다.
무대나 의상 역시 현대적인 모습을 최대한 살렸다. 단순하게 만들어진 무대에는 황금 칠을 한 감옥이 세워져 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했던 신라 말의 공허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의상은 한복의 질감이나 문양에서 취해진 부분도 일부 있지만, 대체로 서양 드레스와 양복처럼 디자인했다.
◇한국 전통과 서양음악 기법 어우러져=국립오페라단의 ‘처용’은 1987년 초연됐던 작품이다. ‘섬집아기’를 작곡한 고(故) 이흥렬의 아들로 오페라 ‘황진이’ ‘목화’ 등을 작곡한 이영조(70)가 작곡을 맡았다. 이번에도 그가 작품 대부분을 다시 매만졌다.
“26년 전 썼던 음악에서 많은 부분을 보완했다. 굉장히 성장한 처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영조 작곡가는 “시대는 오래 전 신라이지만 소리는 현대적이며, 자유롭고 방대해 청중들에게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예전에는 처용을 찾아 경주로 갔다면 이번엔 처용을 압구정동으로 불러오는 심정으로 다시 썼다고 설명했다.
‘처용’은 초연 당시 한국 전통과 서양음악 기법이 잘 어우러진 수작이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각 등장인물을 상징하는 음악적 주제가 반복되는 바그너의 유도동기(Leitmotiv) 기법으로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선명하게 표현해 내 화제를 모았다. 이번 무대도 바그너 풍 음악의 틀 안에서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모티브가 더해졌다.
풍부한 성량의 테너 신동원이 처용 역을 맡아 사유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연기한다. 소프라노 임세경은 나약한 인간을 대변하는 가실 역을, 바리톤 우주호는 갈등과 분쟁, 욕망을 상징하는 역신 역을 맡는다. 1만∼10만원.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