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혈맥’… 대사 생략·시청각 이미지 강조 ‘실험 정신’
입력 2013-05-26 17:16
텅 빈 공간, 무대 장치라고는 천장에서 내려와 걸려 있는 두 개의 링뿐. 조명은 대체로 어둡고, 소품은 배우들이 가지고 나오는 접이식 의자와 우산, 종이, 꽃다발, 컵라면 정도. 배우들이 두세 명씩 나와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들어간다. 여러 명의 조각난 이야기는 시대와 공간마저 섞여 있어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다.
80분간의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의 반응은 이렇다. “재미있긴 한데 무슨 얘기지?” 예술의전당 자유연극시리즈 두 번째 작품 ‘혈맥’이다.
원작 희곡 ‘혈맥’은 해방 이후 연극무대와 방송,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작가였던 김영수(1911∼1977)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품. 1948년 1월 초연됐다. 해방 직후 서울 성북동 근처 빈민촌을 배경으로 해방기의 혼란상과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작이다.
멀리 화려하게 빛나는 도심을 바라보는 산비탈 방공호에 사는 빈민들이 주인공이다. 가난을 벗어나는 일은 영어밖에 없다며 자식을 다그치는 구두쇠 털보, 전처 딸 복순을 기생으로 만들기 위해 매질을 하며 타령을 가르치는 이북 출신 옥매, 행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원팔, 붉은 깃발을 흔들며 이상만 좇는 원팔의 동생 원칠 등이 그들이다.
연출가 김현탁(45·극단 성북동비둘기 대표)의 ‘혈맥’은 리얼리즘의 대표작인 원작과는 사뭇 다르다. 원래 내용을 해체하고, 실험성 짙은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세일즈맨의 죽음’ ‘메디아 온 미디어’ ‘하녀들’ 등 발표작마다 ‘파격’ ‘도발’이라는 평을 받았던 그는 이번에도 자유분방하면서도 독창적인 스타일로 무대를 주무른다. 대사와 드라마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시청각 이미지에 치중했다. 자연스러운 전개 대신 극적인 장면을 두서없이 이어 붙였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원작에서 방공호로 설정된 공간이 ‘시내버스’로 탈바꿈한 것이다. 가족의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로 분절됐다. 김 연출가는 버스로 공간을 치환시킨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방공호는 지금은 없어진 공간이다. 현재의 삶 속에 개인이 따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어딜까. 각각 앉아있는 자리가 자기 영역인, 방공호보다 더 작아진 공간,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버스 손잡이)이 내려진 공간으로 버스를 선택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설명을 듣기 전에는 무대의 배경이 버스였다는 것마저도 관객이 인지하기 어렵다.
불친절한 연극이지만 연출은 재기발랄하다. 이념이 다른 원팔·원칠 형제가 치열한 몸싸움을 하는 동안 무대에는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제곡이 흐른다. 털보가 컵라면에 물을 붓고 익기를 기다리는 2∼3분 동안, 무대에는 정적이 감돈다. 배우는 그저 기다릴 뿐이고, 관객도 이를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무대 위에 흩어진 종이, 떨어진 꽃다발, 쏟아진 컵라면. 우연처럼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치밀한 의도 아래 만들어졌다.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배우들의 연기도 눈길을 끈다. 정통 방식이 아닌 새로운 연극을 찾는 이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이다. 6월 2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2만∼3만원.
한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