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의 여행] 삶이 보내는 모스 부호
입력 2013-05-26 17:19
헝가리 태생의 작가 산도르 마라이(1900∼1989)의 장편 ‘열정’(김인순 옮김·솔출판사·사진)은 75세에 이른 노장군 헨릭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삶에서 맞닥뜨린 미궁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웅숭깊은 소설이다.
헨릭은 젊은 날, 절친한 친구 콘라드와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만당한 것을 알게 된다. 콘라드가 말 한마디 없이 종적을 감추고 그로부터 8년 뒤 아내마저 죽음을 맞은 이래 헨릭은 41년의 세월 동안 고독 속에서 친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헨릭은 41년 만에 자신을 찾아온 콘라드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 하지만 콘라드와 대면하는 순간, 대체 당신과 내 아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는 속물적 질문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헨릭은 오히려 독백을 통해 지나간 세월의 의문들을 스스로 정리해 낸다.
“어느 날엔가 때가 되면 사물들이 말을 하지”라든가 “아버지도 한 여인을 만나 다시 없이 사랑했지만 그 옆에서 끝내 고독하셨네”라는 철학적 웅변이 헨리의 입에서 불현듯 튀어나오는 장면은 압권이다. 인생의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감히 생각도 못할 이 진중한 소설은 현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이 인간 본성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간결하고도 응축된 문체로 설파한다.
독일어에 능통했지만 항상 자신의 모국어를 헝가리어라고 생각한 작가 마라이는 1948년 공산주의 체제의 조국을 떠나 세계를 떠돈다.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을 전전하던 그는 41년이라는 긴 망명생활을 뒤로하고 1989년 2월 89세의 나이로 망명지 캘리포니아에서 목숨을 끊는다. 이미 3년 전 “지나치게 오래 사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다”라고 일지에 쓴 연후이다. 자신이 유럽의 시민으로 태어났음을 늘 자각하면서 “시민이라는 것이 소명”이라고 말했던 마라이는 인간 정신이 범한 범죄를 의식하고 그 책임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를 증언하며 그 원인을 캐고자 했던 작가였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