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잠 깬 곰… 현실을 꼬집다
입력 2013-05-26 17:50
곰 한 마리가 의자에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발레리나가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다. 러시아 사진작가 그레고리 마이오피스(43)의 ‘속담’ 시리즈 중에서 ‘러시아 발레에 대한 취향’이라는 작품이다. 눈밭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곰도 있고,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는 원숭이도 있다. ‘정치는 뜻밖의 동료를 만든다’라는 제목의 흑백 사진이다.
마이오피스는 곰 원숭이 사자 코끼리 등 동물들과 조련사들이 벌이는 퍼포먼스를 작품 소재로 삼는다. 곰은 러시아를 상징하는 동물이고, 발레는 러시아 공연을 대표하는 장르다. 작가의 작업 의도는 즐거운 서커스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한때는 유럽을 지배했으나 지금은 쇠퇴한 러시아 문화예술의 현주소를 패러디한 것이다.
1990년 한국과 수교한 러시아의 문화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소설가 톨스토이와 음악가 차이콥스키 정도다. 이곳 현대 예술가들의 작업, 특히 사진 분야는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최근 세계 유수 미술관에서 러시아 사진전이 잇따라 열리고 있다. 19세기 융성했던 러시아의 문학 음악 무용 등을 토대로 한 사진작품이 각광받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러시아 현대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러시아 현대 사진전’이 6월 10일까지 서울 소공동 롯데갤러리에서 열린다. 러시아의 유명 사진기획자이자 평론가인 이리나 츠미레바와 서울포토 디렉터 강철이 기획한 이번 전시에는 러시아 주요 작가 10명(팀)의 작품 100점이 선보인다.
출품작들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풍자적이다. 안드레이 체쥔(53)의 ‘자화상’ 시리즈는 “개인은 국가라고 하는 기계의 한 톱니일 뿐”이라고 강조한 스탈린의 연설에 반기를 든 작품이다. 몽타주나 콜라주 기법으로 그려낸 인물을 통해 “예술의 주된 구성요소는 인간이다.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반박한 것이다.
변방에서 활동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크멜리 수넬리 아트 그룹(빅토르 크멜, 엘레나 슈흐베예바, 세르게이 루첸코)의 ‘마지막 전투’ 시리즈도 흥미롭다. 동물들의 사체를 매장하는 장소로 쓰였던 공터를 촬영한 ‘전투 이후의 풍경’이 초현실적이다. 옛 소련의 몰락과 소비적인 도시 풍경을 풍자한 작품으로 이를 통해 현대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마리아 코자노바(27)의 ‘거리두기를 선언하다’는 개방 이후 정체성이 붕괴된 시기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을 ‘코스프레’에 빠진 사람들로 비유하고 있다. 코스프레란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의 줄임말로 만화 주인공처럼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해서 캐릭터를 흉내 내는 것을 뜻한다. 꿈과 이상을 잃은 러시아 젊은이들을 지칭한다.
이밖에 바딤 구쉰(50)의 ‘색깔 봉투’, 이고르 쿨티쉬킨(43)의 ‘방카의 장난감들’, 페트르 라흐마노프(27)의 ‘잃어버린 낙원’ 등이 러시아의 현재를 보여준다. 성윤진 큐레이터는 “역사적 격변기로 다져진 흡수력과 역동성이 깃들어 있고, 유서 깊은 문학 음악 등을 바탕으로 상상력과 시적인 해석력이 뛰어난 사진작품”이라고 소개했다(02-726-4428).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