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정종미] 칠백년 흘러온 고려미술의 꽃
입력 2013-05-26 19:06
2003년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를 처음 보았다.아시아미술관은 시립도서관을 개조한 것이었다. 실리콘 밸리의 재벌인 이종문옹이 경비 전액을 기부해 개관전이 ‘고려 명품’전으로 개최되었다. 세계 각 곳의 고려의 명품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로는 최초의 전시였다.
미술관측은 한국현대작가 8명의 현대미술전을 한자리에 마련하는 배려도 해주었다. 한 공간에서 한국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중 한 명으로 참가한 나는 어쩌면 생애 다시는 보지 못할 고려 명품들을 한자리에서 보게 되는 영광을 맛봤다.
개관식에 미술관 앞 광장은 고려의 명품을 보기 위해 방문한 미 전역의 관계자들이 줄을 이었고 시내 모든 호텔은 만원이었다고 한다. 만찬장에서 원더풀을 연발하던 미국인들을 보면서 느낀 뿌듯함은 지금도 나를 들뜨게 한다. 기부를 해주신 이종문옹과 그의 일본인 부인을 꼭 뵙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으나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日 가가미진자 소장의 수월관음도
미술관 측은 이 전시의 메인 작품으로 일본의 가가미진자(鏡神社) 소장인 ‘수월관음도’를 채택했고 엄청난 규모의 이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로비에 별도의 벽면을 마련하였다. 이 그림은 1310년 충선왕의 비인 숙비김씨가 발원하여 김우문 등 8명의 궁중화가가 그렸다. 형태나 구성 그리고 색채에 있어서 완성도가 매우 높다. 길이가 거의 419㎝, 폭이 254㎝의 비단 두루마리 그림인데 엄청난 크기로 인해 이것을 걸 수 있는 별도의 벽면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원화에서 일부 잘린 것이라고 하니 원화의 크기는 짐작이 되며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여러 장의 비단을 이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한 장의 비단에 그렸다는 것이다. 현지 큐레이터의 설명을 빌자면 고려시대에 이 정도 크기의 비단을 짜자면 엄청난 크기의 베틀이 필요하다고 한다. 베틀뿐 아니라 그림을 묶어 매는 쟁틀의 크기는 물론이거니와 비단의 앞뒤로 얹혀진 안료와 전색제 등의 사용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의 경제 단위로 환산한다면 아마도 63빌딩을 지을 정도의 경비를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에 동해안 삼척 근방에 왜적들의 침입이 잦자 이것을 막기 위해 무마용으로 일본에 전해졌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본 순간 내 뇌리에 새겨져 있는 한국미술에 대한 생각을 전면 수정하였다. 7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 그림은 조상들의 보존기술이 최상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또한 천연 안료의 선명하면서도 깊이 있는 색감과 관음의 고혹적인 자태는 고려시대 우리 문화의 수준을 가늠케 해주기 때문이다.
이후로 생전에 다시 보지는 못하리라 늘 사무치던 나는 양산통도사에서 다시 한번 관음을 뵐 수 있었다. 이번이야말로 정말 마지막이라 여겨져서 나는 단숨에 양산으로 달려갔다. 통도사가 가가미진자 측에 대여를 요청했고 실현 불가능한 이 일이 양국 스님들의 우정으로 성사되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게 된 관음은 몇 달을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모나리자에 버금가는 아름다움
나는 그 앞에서 오랫동안 관음의 숨소리를 듣고 체취를 맡았다. 가슴을 훑는 아림이 있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일간지들은 ‘수월관음도’를 ‘모나리자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이라는 엄청난 제목을 붙여 대서특필하였다. 아무리 어여뻐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현대 혹은 서양 미술품은 블록버스터 전시까지 하면서 재탕 삼탕을 거듭하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 조상들의 그림은 한번 보기조차 이리도 어려운 것인가? 원화까지는 아니어도 복원작이라도 가까이 두고 볼 수 있다면….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정종미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