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⑫ 사회적 기업
입력 2013-05-26 18:00 수정 2013-05-26 22:34
정부-민간의 사각지대 메우는 獨 ‘사회적기업’
독일의 사회적 기업은 정부와 민간의 사각지대를 메우며 ‘기회의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기회를 균등하게 주자는 것이다. 개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가정이, 가정이 못하는 일은 지역 공동체가, 지역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정부가 나선다는 게 전통적인 독일 특유의 ‘보충성의 원리’다. 여기에 사회적 기업이라는 또 한 층의 완충장치가 더해져 제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를 타고 2시간여 달린 끝에 나타난 작은 도시 카스트로프-라우셀(Castrop-Rauxel). 루르공업지대에 속하는 곳으로 우리 파독 광부들이 조국 근대화를 위해, 가족에게 생계비를 보내기 위해 갱도로 뛰어들었던 장소이기도 하다.
부활절을 앞둔 성(聖)금요일 휴일이었지만 언론진흥기금 후원으로 한국에서 온 취재진을 맞기 위해 뷰랄 대표가 특별히 시간을 냈다.
찬슨베르크(Chancenwerk·기회 공작소)는 터키계 이민 2세인 뮤라트 뷰랄(Murat Vural·37) 대표가 세운 교육 분야의 사회적 기업이다. 처음에는 터키계 이민사회를 위해 공헌할 방법을 찾던 뷰랄 대표가 누나와 함께 시작한 공부방이었다. 이것이 16개 도시, 35개 학교 학생 1700명의 방과후 학습 지도를 담당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의 야학 또는 공부방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고학년(16∼17세)이 저학년을 가르치고 저학년이 고학년이 되면 다시 어린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의 연결고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성취감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스스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점을 깨우치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다.
뷰랄 대표의 부모는 생계에 급급해 자식 교육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10대에 독일로 이민 온 그는 언어 장벽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대학 입학에 성공했다.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는 본보기가 된 것이다.
현재 기회 공작소엔 203명의 대학생이 활동하고 있다. 많은 대학생들이 이곳 출신이다. 이들은 각자 8명 정도의 고학년 아이들을 상대로 토론식 수업을 펼친다. 모든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알려주는 게 원칙이다. 대학생에게 도움을 받은 고학년 아이들은 각자 저학년 아이 2명을 가르쳐야 한다.
저학년 아이들은 10유로(약 1만4300원)를 기회 공작소에 내면 한 달에 12시간 방과후 학습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주로 이민자와 저소득층 자녀들이 기회 공작소의 문을 두드린다. 뷰랄 대표는 “무료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경우 오히려 참여율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일부러 돈을 받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기회 공작소의 가장 큰 특징은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나중에 도움을 갚는 ‘기회의 연결고리’ 시스템이다.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고학년(16∼17세) 학생들은 기회 공작소의 대학생 교사에게 학습지도를 받는 대가로 저학년(12∼15세) 아이 2명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고학년 학생들은 저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도 무언가 잘하는 게 있구나.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구나’ 하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게 된다. 대학생들로부터 학습지도를 받은 만큼 배움을 나눠야 하기 때문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심어준다. 고학년 학생들은 돈을 내지도 받지도 않는다. 받은 만큼 돌려주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의 연결고리는 대학 졸업 뒤, 취직한 다음에도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
◇기회의 연결고리로 선순환=이해할 때까지 가르쳐주는 토론식 수업이기 때문에 성과는 확실한 편이다. 느려도 천천히 모든 아이들이 이해할 때까지 알려준다. 이렇기 때문에 저학년들은 공부에 자신감을 갖게 된다. 공부와 담을 쌓았던 아이들도 자신을 가르치는 고학년을 우러러보게 되고, 소외계층이라는 같은 처지의 형·누나가 공부를 술술 알려주기 때문에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저학년 아이들은 고학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배움을 나누는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저학년 아이들이 매달 내는 10유로는 대학생 교사의 수고비(매월 160유로)로 지불된다. 기회 공작소는 각 지역의 대학들과 협약을 맺고 있다. 대학생 교사들은 기회 공작소에서 240시간 활동할 경우 10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다. 쾰른, 보쿰 대학 등 상당수 독일 대학들은 30점 이상의 자원봉사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기회 공작소의 대학생들은 30명의 전문 트레이너로부터 교수법을 배운다. 대학생 교사의 상당수는 사범대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기회 공작소에서 가르치는 경험은 교사생활을 미리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기회 공작소가 학업에 도움이 되느냐’는 물음에 85%가 ‘매우 그렇다’ 또는 ‘그렇다’라고 답변했다. 기회 공작소는 거쳐 간 아이들의 학업 성적 향상도와 취업 여부를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아직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지 않았지만 수년 안에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후원과 재능기부로 운영=기회 공작소는 17곳의 기업과 재단으로부터 연간 60만 유로(약 8억원)의 후원을 받아 운영된다. 독일에선 꽤 유명한 가정용 잡화 프랜차이즈 버틀러즈(Butlers)를 비롯해 사회적 기업을 대상으로 한 벤처캐피털 금융기관인 본벤처까지 다양한 기업들이 기회 공작소를 후원한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의 재능기부도 줄을 잇는다.
방과후 학습지도 분야의 성공에 힘입어 기회 공작소는 최근 직업훈련 시스템에도 ‘기회의 연결고리’ 프로그램을 접목시켰다. 직업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해서다. 직업훈련은 대학생에겐 사실 버거운 일이다. 그래서 기업에 다니는 기술자들이 방과후 학습지도를 맡고 있다. 대학에 가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일찍부터 직업 훈련을 시키는 독일의 교육제도를 염두에 둔 프로그램이다. 기회 공작소는 문화·예술·체육 방면으로도 ‘기회의 연결고리’ 프로그램을 확대해 다양한 분야를 꿈꾸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계획이다.
뷰랄 대표는 “가르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고, 배우는 과정에서 ‘나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자랑했다. 이민자 자녀로 태어나 대학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이제 사회적 기업을 경영하며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기회 공작소에선 기회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엔 학교가 내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독일의 교육 방침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며 “더 이상 학교는 거대한 장벽이 아니라 더 나은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파트너로 보인다”고 말했다. 언어 장벽에 막혀 좌절했던 소년 뷰랄은 불굴의 의지와 나눔의 정신으로 교육 분야 사회적 기업을 일궈 독일 교육계의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다.
카스트로프-라우셀=선정수 기자 jsun@kmib.co.kr
■ 자문해주신 분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뮤라트 뷰랄 Chancenwerk CEO ▲이의헌 JUMP 대표 ▲임수길 SK그룹 상무 ▲이병훈 현대자동차그룹 이사 ▲이상화 독일외환은행 법인장, 김대우 부장 ▲김재구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원장 ▲박수진 프라이대학교 한국어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