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13) 한국교회에 바치는 老 신학자의 4가지 선물
입력 2013-05-26 16:54
1989년 정년을 맞이하면서 40년 동안 몸담았던 장신대를 떠나게 됐다. 동시에 미국을 비롯한 해외를 중심으로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 신학도들을 가르치는 일이기에 해외 신학교가 주된 일터가 됐다.
미국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 교수(3년)를 시작으로 나성(LA) 장로회신학대 대학원장(2년6개월), 러시아 모스크바 장로회신학대 학장(5년),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 신학교 총장(3년)…. 뒤돌아보니 현역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본격적인 미국 생활이 시작된 건 88년 겨울부터다. 시카고에 도착해 맥코믹 신학교 교수 생활을 3년 정도 이어갈 무렵, LA 장로회신학교 측으로부터 곧 신설되는 대학원을 책임져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92년 초, LA로 이사를 가 강의를 시작했는데, 몸이 서너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교수가 많이 없어 이 과목 저 과목 맡겨지는 대로 모두 가르쳐야 할 형편이었다.
LA에서 생활한 지 2년 반쯤 됐을까. 한국으로부터 빅뉴스가 전해졌다. 김일성 주석이 죽었다는 것이다. 휴전선이 곧 열릴 것만 같았다.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밀려왔다. 마침 한일신학대학(현 한일장신대) 측으로부터 한국에서 제자들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래서 그 해 9월,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휴전선은 지금까지도 열리지 않고 있다.
그 당시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고민이 줄곧 맴돌고 있었다. ‘한국교회를 위해 내가 조금이라도 공헌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였다. 궁리 끝에 한국성경연구원을 조직하기로 했다. 목사들의 설교를 돕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목사들은 무조건 대형교회를 이루려는 생각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성경 연구나 기도 시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목회학에서는 목회자 1명이 감당하는 데 적당한 성도 수는 100명 정도로 본다.
하지만 그 이상 되는 성도들을 맡다보니 목사들의 성경연구는 턱없이 부족했다. 신학교에서도 성경연구방법론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들은 성경구절의 진의(眞意)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강단에 서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마디로 ‘바빠서 못하고 몰라서 못하는’ 현실이었다.
한국성경연구원의 역할은 명확했다. 신·구약 성경학자들을 통해 설교 본문의 참뜻을 해석해 잡지로 설교자들에게 배부하는 것. 94년 11월부터 시작된 성경연구지(紙)는 13년 만인 2007년에 성경 66권의 주요 구절들을 모두 다룰 수 있었다.
평신도 성경교재를 만든 일도 은퇴 후 보람된 사역으로 기억된다. 1982년 봄, 당시만 해도 한국 교계에 평신도 성경교재는 루터교회가 만든 ‘벧엘성서연구’가 전부였다. 이 교재는 30개 주제를 중심으로 성경 여러 곳을 참고하면서 공부하는 교안이었다. 나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을 한 권씩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꼭 20년에 걸쳐서 완성됐다. 인쇄 작업만 남겨둔 상태다.
한 가지 더 소개하고 싶다. 한평생 성경원어를 다루는 신학자 입장에서 신약성경을 사역(私譯·개인 이름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평생소원이었던 사역 작업을 2007년 끝냈다. 한국성경연구원 사역과 평신도 성경교재 발간, 신약성경 사역은 죽기 전에 꼭 해놓고 싶었던 나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 목록 네 가지 가운데 세 개다. 나머지 하나는 현재 준비 중인 자서전 쓰기다. 나이 아흔이 넘도록 이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게 이끌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