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의 귀환] 지∼지∼직∼ 잡음나도 좋아

입력 2013-05-25 04:02


“LP는 CD보다 훨씬 정이 깊다. 수고나 지출을 아끼지 않고 깊이 사랑해주는 만큼 반드시 보답이 돌아온다. CD는 취급이 간편하고, 언제 어디서든 깨끗하고 정확한 소리를 내주지만 LP와 열성적인 청자 사이의 ‘마음의 교류’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LP판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LP음악은 국내에서도 하루키 같은 중장년 마니아층을 통해 1990년대 CD시대가 열린 이후에도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MP3에 의한 ‘CD의 종말’을 언급하는 요즈음, 시대를 거슬러 LP가 돌아오고 있다. 그것도 중년 애호가들의 추억에 기댄 복고바람이 아니라, 20∼30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트렌드로 말이다.

25일 서울 논현동의 복합문화공간 플래툰 쿤스트할레에 열리는 ‘서울레코드페어’가 이런 경향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행사다. 이 음악 페스티벌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LP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서울레코드페어는 절판된 음반이나 CD를 LP 한정반으로 제작해 특별판매하고, 40여개의 음반 레이블과 소매상, 음향기기업체 등이 참가해 수만 점에 달하는 LP와 CD를 전시·판매한다.

2회 동안 누적관객이 7000명을 넘어섰고, 올해는 5000명이 행사장을 찾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매출도 첫 해 1억원에서 2회 1억8000만원으로 늘었다. 행사 날에는 개막 전부터 아침 일찍 장사진을 이루기도 한다. 줄을 서는 열혈 팬들은 역시 젊은 20∼30대들이다.

서울레코드페어를 기획한 김영혁 본부장은 “관객 대부분이 턴테이블 돌아가는 걸 처음 봤다는 젊은 층”이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이들은 좋아하는 가수의 LP가 CD보다 크고 희귀하기 때문에 일종의 기념품으로 구입하는 ‘팬심’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며 “LP를 샀으니 들어보고 싶어지고, 해외 구매대행이나 인터넷을 이용하면 50∼100달러에 보급형 턴테이블을 싸게 살 수 있어 결국 LP팬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씨는 “아날로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는 LP가 뉴미디어이자 새로운 문화”라며 “LP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변화는 가수들이 신보를 LP로 찍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1집 ‘별일없이 산다’를 LP로 내놓았고, ‘브라운아이드소울’, 김C, ‘2AM’, 이승열, 하동균 등이 LP를 발표했다. 올해는 아이돌 그룹 ‘빅뱅’ 멤버인 지드래곤도 LP 대열에 합류했다.

이 같은 ‘LP의 귀환’에 사라졌던 LP생산 공장도 다시 문을 열었다. 경기도 김포의 LP팩토리라는 곳이다. 마지막까지 LP를 찍어내던 서라벌레코드 공장이 폐업한 후 6년 만인 지난 2011년 오픈한 국내 유일의 LP공장이다. 공연기획자 출신인 이길용 대표는 “5월 한 달 동안 만들어야 할 음반만 9000장”이라며 “조용필의 신보 ‘헬로’도 곧 나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LP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LP에 대한 가수들의 ‘로망’과 일종의 ‘차별화 전략’에 힘입은 바 크다. 이길용 대표는 “가수들과 얘기해 보니 고생해서 만든 음악이 핸드폰에 1주일 정도 저장됐다 지워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며 “소장용인 LP에 자신들의 음악이 좀더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 외국의 경우 음악성 있는 가수들을 중심으로 LP가 발표돼 왔기 때문에 LP 발매를 통해 뮤지션으로서의 이미지 부각을 노리는 측면도 크다는 것이다.

최근의 ‘LP의 재발견’이 디지털 음악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분석도 있다. 평론가 최규성씨는 “LP 음악은 음폭이 넓고 풍부할 뿐 아니라 일상에서 듣는 소리와 가장 근접한 ‘힐링 뮤직’”이라고 평했다. 하루키가 ‘정이 깊다’고 표현한 것처럼, 깨끗한 디지털 음악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지지직거리는 아날로그 사운드에 되레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LP가 K팝 시장의 새로운 상품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월드투어를 하고 있는 지드래곤의 경우 소량이기는 하지만 대만과 홍콩 콘서트에서 선보인 LP가 모두 팔려나갔다. 야광봉이나 열쇠고리 같은 흔한 공연 기념품에 질린 해외팬들이 몰렸다. 이전의 까만 LP판이 아니라 지드래곤의 사진을 넣은 ‘컬러 LP’를 만들어 팬들의 소장욕구를 자극한 것도 주효했다.

김영혁 본부장은 되살아난 LP붐이 한 때의 유행이 아닐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미국에서도 LP 판매고가 5년 연속 성장세를 기록하며 시장이 커지고 있다”며 “국내 LP시장도 당분간 해마다 두자리수씩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LP에 대한 향수를 가진 7080세대는 먼지 쌓인 옛 전축을 끄집어내고, 20∼30대는 MP3를 함께 재생할 수 있는 ‘디지로그식’ 턴테이블을 켜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다시 LP의 시대다.

권혜숙 기자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