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수 시집 ‘숙녀의 기분’ 희망과 꿈 잃은 ‘숙녀들’에 대한 보고서

입력 2013-05-23 17:47


평론가이자 시인인 박상수(39·사진)의 두 번째 시집 ‘숙녀의 기분’(문학동네)은 처녀들의 수다에 귀 기울이게 하는 우리 시대 ‘걸 그룹’에 대한 보고서이다. 여기서 지칭된 숙녀란 한때 ‘어엿한 여대생’이라고 호칭했던 누군가의 딸이며 19세로 앞 당겨져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새내기 성인 여성들이다. 그 한창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의 수다는 희망과 꿈의 대척점이라 할 좌절과 패배에 맞춰져 있다.

“좀 가, 냄새나니까 좀 가// (중략)// 내가 시험 떨어졌다고 이러는 거니?// 한 번 더 떨어져서 다섯 번 채워, 다음엔 어디 국토대장정 같은 데라도 갔다 와 거기 가면 울면서 어른이 된대”(‘기숙사 커플 부분’)

취업 준비 중인 여대생 기숙사에 남자친구가 위로 차 방문한다. 네 번째 치른 시험에서 낙방한 여자친구를 달래주려고. 하지만 위로는커녕 그 냄새나는 남친 앞에서 여친은 눈물을 쏙 빼고 만다. “울면서 어른이 된다”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치아교정기를 낀 우리 시대 여대생의 이 일상적 단면은 기숙사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잠을 언제 자는 걸까// 일부러 한 여자애만 노려봤지 걔가 언제 화장실에 가는지 알고 싶었어 내가 세 번이나 갔다 올 동안 걔는… 비범했다 나보다 세 살은 어려 보였고, 말도 안돼, 스타크래프트 밴에서 갓 내려선 스타일이라면/ 나한테는 답이 없는 거지”(‘24시간 열람실’ 부분)

간만에 열공(?)하려고 입실한 24시간 열람실에서 가상의 경쟁자인 여자애는 엉덩이를 붙인 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얼굴까지 반반한 탤런트 감이라면 ‘나’에겐 답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취업은커녕 열람실에서부터 토해낼 수밖에 없는 이 패색 짙은 푸념이야말로 대학 4년 동안 펜대를 굴리고도 미래가 불투명한 우리 시대 숙녀들의 현실인 것이다.

“‘언니20만요’// 어떻게 알까? 알람을 맞춰놓은 걸까? 내 월급날을 어떻게 후배 1이…// (중략)// 입을 다물고 쓰레기봉투를 묶었지 관절을 덜컹대다가 창고에서 뒹굴뻔했어 아, 즙이 많은 이런 덩어리를! 나도 모르게 노이즈 레벨을 올렸다가 껐다”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대생에게 후배가 월급날에 맞춰 문자를 보내온다. 20만원만 꿔달라고. ‘나’는 젖은 쓰레기봉투를 묶다가 관절이 삐끗대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고 만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열등감과 패배감을 곱씹어야 하는 미지의 숙녀들을 하나의 시적 대상으로 계층화한 게 이 시집의 개가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