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시집 ‘방!’ 개발 앞에 무너져가는 쓸쓸한 시어들

입력 2013-05-23 17:48 수정 2013-05-23 19:55


얼마 전 비 내리는 오후, 경남 울주군에 사는 정일근(55·사진) 시인이 상경해 막 출간됐다는 시집 한 권을 손에 쥐어주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여름을 재촉하는 빗줄기만 쳐다보며 이내 헤어지고 말았다. 시집 제목이 ‘방!’(서정시학)이어서 목차를 찾아보았지만 ‘방’이란 시는 없고 대신 시인의 말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문(禪門)에서 ‘방’이란 몽둥이란 뜻이다. 내게 방!이란 나를 때리는 시의 몽둥이다.”

시력 30년에 11번째 시집을 낸 정일근의 얼굴은 아픈 사람처럼 푸석푸석해 보였다. 1988년 불혹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쓰러진 그는 두 차례의 뇌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나 2001년부터 울주군 은현리에 깃들어 살아왔다. 경남대 국문과 강의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은현리에서 지내는 그의 신작 시집엔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적적함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달팽이와 함께 느릿느릿 사는 사람의 마을에/ 개별꽃 곁에 키 작은 서점을 내고 싶다/ 낡은 시집 몇 권이 전부인 백양나무 책장에서/ 당나귀가 어쩌다 시 한 편 읽고 가든 말든/ 염소가 시 한 편 찢어서 먹고 가든 말든”(‘치타슬로’ 전문)

이탈리어로 ‘느리게 사는 도시’라는 의미의 ‘치타슬로’를 제목으로 앉혔으니 그가 내고 싶다는 서점에 초대받은 이는 꼭 사람이 아니라도 좋을 것이다. “청솔당 나무 우체통을 열어보니 가을이 은현리 819번지 시인에게 보낸 긴 편지 한 장 받았습니다/ -귀뚜라미 한 마리”(‘가을편지’)에도 사람 대신 귀뚜라미가 등장한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은현리의 귀뚜라미나 씨감자나 탱자나무는 사람과 동등한 인격체이다.

그런 은현리가 요즘 개발 붐으로 망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은현리에 새 길을 내고 마지막 남은 탱자나무 울타리마저 베어낸 뒤 조립식 집을 세워 부동산 간판을 달았단다. “촌집 삽니다 촌집 삽니다 광고 붙었다/ 그때부터 쌍떡잎식물 쥐손이풀목 운향과의 낙엽관목 탱자나무/ 은현리에서 멸종식물이 되었다”(‘멸종의 이유’ 부분)

정일근이 끝내 들려주지 못한 말이란 시인도 이제 곧 멸종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 목소리였을까. 그는 시의 영토, 자연의 영토가 자꾸 좁아지고 있음에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숨 막히는 일이라/ 내 저주 위에 내가 주저앉아 시를 쓴다”(‘저주’)에서처럼 잔뜩 속상해 있다. 그의 상한 속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이번 시집에 김달진문학상이 주어졌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