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주 장편 ‘불가능한 동화’ 달 표면 걷는 듯한 문장 ‘오감도’ 보는 듯한 서사
입력 2013-05-23 17:48
젊은 소설가 한유주(31)의 문장은 저벅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분명 걷고 있는데 소리가 없다. 그렇다고 우주 유영도 아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달 표면을 걷는 것처럼 부력을 갖고 있다. 이른바 ‘문 워크(moon walk)’이다. 읊조리는 듯한 시적 문장과 기존 서사를 해체하는 형식으로 관심을 받아온 그가 첫 장편 ‘불가능한 동화’(문학과지성사)를 냈다.
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누구의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누구에게도 불려지지 않는다. 온몸에 푸른 멍과 붉은 상처가 있는 아이다. 아이는 늘 취조하듯 대하는 엄마가 무섭다. 세상이 무섭다. 마치 천재 시인 이상(李箱)이 ‘오감도’에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러오/ 제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러오”라고 썼듯. 한유주의 아이도 세상이 무섭다. 열세 살 아이의 이름은 소설에서 밝혀지지 않는다. 그저 아이라고 불린다.
“아이가 서너 살 더 어렸을 때의 일이다. 그날부터 아이는 엄마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대들지 않는다. 아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엄마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아이는 항상 무릎을 꿇고 몸을 아주 작게, 먼지처럼, 낱알처럼, 벌레처럼 작게 만들어야 한다.”(39쪽)
아이는 늘 옷을 겹쳐 입고 있다. 몸에 난 멍 자국을 가리기 위해서다.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폭력적인 세계를 일기장에 담아낼 수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일상을 요구하는 숙제 앞에서 누적된 분노가 폭발한다. 밤을 틈타 교실에 들어간 아이는 급우들의 모든 일기장에 급우들의 필적을 흉내 내어 자신의 문장을 적어 넣는다. ‘나도 병아리를 죽여보고 싶다’라고 쓴 급우 박영우의 일기장을 펼쳐 이렇게 이어붙이는 식이다. ‘나도 죽여보고 싶다.’
아이의 일기장 낙서로 교실은 발칵 뒤집힌다. ‘경찰서에 가서 거짓말 탐지기를 해보자’는 선생님의 허풍스런 말에 아이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기장들을 옆구리에 끼고 도망치다가 같은 반 친구 미아와 마주친다. 미아의 아버지는 둘이다. 미아의 어머니는 그 둘 사이를 오간다. 그런 미아에게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기절놀이 할까. 너 기절해본 적 있어. 아이가 묻는다. 미아에게. 기절했다 깨어나면 기분이 좋아져.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돼.”(174쪽) 아이는 마침내 미아의 목을 조른다. 미아는 움직이지 않는다.
한유주는 여기까지 써놓고 이렇게 이어 붙인다. “우리는 아이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직까지는. 사건은 흔적을 남긴다.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흔적의 흔적은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아이가 움직이지 않는다.”(185쪽)
하지만 여기까지가 1부이다. 그렇다면 2부는? 2부는 문학 강의를 하던 ‘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와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말하자면 두 차원의 이야기가 서로 스미고 교묘하게 얽히는데, 결말에 이르러 한유주는 자신이 쌓아올린 언어로 된 성(城)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붕괴의 미학을 보여준다. 작가가 쓰고 있는 작중 인물 아이가 작가에게 개입해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하세요”라고 따지는 장면은 섬뜩하고도 기괴하고도 아름답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한유주가 쓴 소설인가, 아이가 쓴 소설인가, 아니면 한바탕 꿈속인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