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맹경환] 순안공항의 감동과 천안함 사이
입력 2013-05-23 18:57
지난달 중동으로 출장을 떠나려던 후배는 현지 분위기 파악을 위해 인터넷으로 로컬 언론부터 살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곳이라 취재도 취재지만 우선 안전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후배는 “그쪽 신문을 보니 한국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라며 “한국을 떠나는 것이 더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농담을 했다.
한반도 위기 상황이 고조되면 우리 보다 해외 언론들이 더 ‘호들갑’을 떤다. 미국 언론들은 연일 한반도 상황을 1면으로 내보냈고, 방송에서는 북한 문제를 주제로 장시간 토론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북한 위협에 무덤덤한 한국인들을 신기해하는 기사도 단골 메뉴다. 르몽드는 “북한이 군사적 위협을 강화하지만 한국인들은 면역이 된 것처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의아해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1994년 북한의 ‘서울 불바다’ 발언 당시 사재기가 기승을 부릴 정도로 국민들은 불안해했다. 선거 때마다 ‘북풍’도 세차게 불었다.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의 변화에 대해 일부 언론들은 국민들의 ‘안보불감증’을 호되게 야단도 쳤다. 그래도 연세대 문정인 교수의 반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6·15 남북공동선언 1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에서 ‘안보 불감증’이야말로 “6·15 선언이 우리 국민들에게 준 선물”이라고 했다. 국민들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생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는 주장이다.
김정은이 중국에 특사를 파견하면서 북한의 도발로 촉발된 위기 상황은 전환점을 맞고 있다. 늘 그랬듯 한반도의 위기는 대화를 통한 해결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북한이 과거처럼 도발에 대한 보상을 만족스럽게 못 받을 수도 있지만. 그동안 학습효과로 중국 등 주변국들의 북한 대처법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번 한반도 위기의 전개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변화가 있다. 한창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 주변에 “라면이라도 사놔야 하는 거 아니냐”는 사람이 하나 둘 생기더니 결국 “생수를 비축해 뒀다” “랜턴을 장만했다” “라면을 더 살 걸 그랬다”는 사람들이 늘었다. 물론 사재기가 대세는 아니었다. 그래도 분명 이전에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뭔가 밑바닥 민심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녀석은 북한의 선전 포고에 “내일 전쟁이 날 것”이라며 불안해했었다. 키 리졸브 훈련이 시작되는 지난 3월 11일을 앞두고 학생들 사이에선 SNS나 카카오톡을 통해 전쟁설이 확산됐었다. 괴담으로 치부해버릴 일이 아니다.
아직 북한 도발이 전쟁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10명 중 7∼8명은 실제 북한이 도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여론조사도 있다. 설마 하는 기대감과 굳건한 한·미 동맹에 북한이 자멸로 이르는 도박을 안 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반영된 셈이다.
그래도 세대별로 드러나는 편차의 함의는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 가장 많이 북한의 도발을 걱정하는 연령층은 20대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20대가 한반도의 통일이 불가능하고, 통일 후에 오히려 국력이 약화될 것으로 보는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아마도 갈수록 확산될 것이다.
2000년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뜨겁게 포옹하던 감동은 어느덧 잊혀지고 있다. 반면 천안함의 참혹함에서 느껴지던 전율은 점점 생생해지고 있다. 순안공항의 감동과 천안함 사이에서 국민들은 갈등하고 있다.
맹경환 국제부 차장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