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의구] 인터넷 조리돌림
입력 2013-05-23 18:50
“피해자 인격 살해하는 신상털기 막으려면 네티즌의 관음증 탈피 노력 있어야”
씨족공동체 성격이 많이 남아있던 옛날 조리돌림이란 형벌이 있었다. 미풍양속을 저해한 죄인의 등에 북을 지우고 죄상을 적어 붙인 다음 마을을 몇 바퀴 돌리는 것이다. 당사자에게 창피를 주고, 공동체 전체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재발을 방지하려는 제재 방식이다.
5·16 직후 군사정권은 이정재 등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들을 잡아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을 앞세워 가두행진을 시킨 뒤 사법처리했다. 프랑스에서도 2차 대전 후 친 나치 성향의 비시 정권에 협력한 여성들을 삭발시켜 조리돌림을 시킨 예가 있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에는 인민재판과 조리돌림이 성행했다. 중국에서는 최근까지도 수갑을 채운 범죄자에게 이름을 새긴 나무판자를 목에 건 채 운동장 단상에 한참을 세워두는 조리돌림이 행해졌으나 인권 침해 논란이 일자 당국이 금지시켰다.
요즘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길 때마다 관행화되다시피 한 인터넷 신상털기는 조리돌림을 연상시킨다. 누군가가 사건 관련자의 실명과 사진, 나이, 직업, 학력, 주소 등을 알아내 인터넷에 낱낱이 공개하는 것이다. 범법자의 경우라도 잔혹범이나 파렴치범이 아니면 프라이버시는 보호하는 게 보도의 기본 준칙인데 신상털기는 예외가 없다. 확정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무죄 추정이 원칙인데 온갖 개인정보를 털어 불이익을 가한다.
신상털기와 조리돌림은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신상털기는 익명의 그늘에 숨은 개인이 사건의 판결자요, 조사자다. 이면에 냉혹한 관음증과 영웅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반면 조리돌림은 마을의 원로들이 회의를 거쳐 죄상을 파악하고 공개를 결정한다. 조리돌림은 사건을 공개함으로써 재발을 막자는 취지지만 인터넷 조리돌림은 개별적 호기심이나 개인적 감정의 표출이 원인이자 최종 목적이다.
조리돌림은 범죄자나 풍속사범을 대상으로 하지만 신상털기는 범죄자, 피해자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사악한 촉수를 뻗는다. 박시후씨 사건 당시 피해여성의 이름과 사진 등이 온라인에 퍼졌다. 지난해 11월 ‘성추문 검사’ 사건 때도 피해여성의 사진이 유포됐다. 피해자 신상털기는 성범죄 못지않은 고통을 안기는 인격 살인이다.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고 사회의 건전한 이성을 마비시킨다.
인터넷 조리돌림은 사실이 아닌 정보를 유포해 엉뚱한 피해를 유발하기도 한다. 최근 발생한 가수 손호영씨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의 경우도 무관한 여대생 사진이 올라 물의를 빚었다. 망자의 빈소를 지킨 손씨를 향해 미국으로 출국했다거나 매니저가 연락을 받고 달려가 블랙박스 USB를 빼갔다는 등 근거 없는 음모론이 유포됐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사건 때도 피해자의 가짜 사진 등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신상털기는 정보보호법에 위반될 뿐 아니라 형법의 명예훼손에 해당한다. 성추문 검사 사건의 경우 피해여성의 증명사진을 유출한 검사 2명이 벌금 500만원과 300만원에 약식기소됐다. 유출과 관련 없지만 업무와 관계없이 전산망에 접속한 현직 검사 3명 등 8명에 대해 경징계가 청구됐고, 9명에게는 경고가 내려졌다. 엉뚱한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던 30대 남성도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신상털기를 원천차단 하기는 어렵다. 인터넷 세상은 한없이 넓고 사법당국의 할 일은 너무 많다. 무신경하게 남의 글을 퍼 나르는 행위를 일일이 단속하기 쉽지 않다. 인터넷 조리돌림을 막으려면 당국의 강력한 처벌 의지도 필요하지만 정보가 유통되는 길목을 관리하는 인터넷 및 통신업체들이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문제 소지가 발생하면 위법성 여부를 신속히 판단해 차단할 수 있는 조직과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네티즌이나 SNS사용자들의 각성과 자정노력이 있어야 비겁한 신상털기 행태가 아예 발붙일 수 없는 토양이 마련될 수 있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