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의 역설… 유럽 ‘풀뿌리 민주’ 살아났다
입력 2013-05-22 19:16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 인구 2만2000명의 베드타운인 톨레로도네스에 살던 엘레나 비우런(37·여)씨는 두 아이를 키우던 평범한 주부였다. 그는 2005년 집 근처 하수구의 악취를 견디다 못해 시청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시청 측은 수리를 차일피일 미뤘다. 견디다 못한 비우런씨는 일주일에 두 번씩 시청을 찾아 문제해결을 촉구했다. 그리고 6년 뒤인 2011년 5월 지방선거에서 비우런씨는 톨레로도네스 시장으로 당선됐다.
경제위기로 인한 긴축정책으로 공공서비스가 축소된 스페인 등에서 주민들이 무관심했던 정치에 눈을 돌려 지방자치단체의 공공서비스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등 유럽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경제위기를 계기로 강화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22일 보도했다.
신문은 평범한 주부에서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비우런 시장의 예를 들며 주민들이 주변 환경 변화를 위해서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그가 시장이 된 뒤 톨레로도네스 시정은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전임 시장의 운전기사에게는 다른 일을 맡겼다. 관용차는 렌터카로 대체됐고 직접 시장이 운전했다. 경찰호위도 없어졌다. 시장을 보좌하던 4명의 유급 보좌관 대신 직접 문제를 해결한다. 9만1445유로였던 연봉은 4만9500유로까지 낮췄다. 정실인사는 생각도 못한다.
뿐만 아니라 시민자문위원회를 개설해 주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경비절감으로 얻어진 100만 유로로 동네 축구장을 보수하고 자전거길도 새로 포장했다. 예산도 3개월에 한 번씩 인터넷에 모두 공개했다.
이런 변화는 1975년 프랑코의 독재가 마무리된 뒤에도 여전히 직접 선거를 통해 정당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을 꺼려 하던 분위기에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투표나 시위 외에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주민의 숫자는 2008년 27%에서 2010년 39%까지 늘었다.
풀뿌리 정치는 스페인 외에도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에서도 활발하다. 정치 풍자 코미디언 출신으로 정부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베페 그릴로가 이끄는 오성운동은 2월 치러진 이탈리아 총선에서 상원 54석, 하원 108석을 획득하며 일약 제3당에 올랐다. 오성운동은 2009년 창당된 신생 정당으로 직접민주주의 확대와 반부패를 기치로 내걸고 있다.
2010년 집권한 야니스 보우타리스 그리스 테살로니키 시장의 경우도 비슷한 예다.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그는 경비절감을 위해 경쟁입찰 제도를 쓰레기 처리와 인쇄 부문에 도입해 80%의 시 예산을 절감하고 남는 돈을 축소된 공공서비스 분야에 투입했다.
예산절약은 곧바로 재정 투명성 제고로 이어졌다. 국제투명성기구에 따르면 스페인 주요 110개 도시 중 33개 시가 투명성지수에서 1등급을 받았다. 2008년 겨우 1개였던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다. 또 나바라주의 경우 정보공개법을 스페인 최초로 도입해 효과를 보자 중앙정부도 비슷한 법안을 심사 중이다. 마리오 쿠엘라는 “사람들이 좀 더 민주적인 시정을 위해서는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