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디미방’ 밥상에 일월산 산채 쓰는 까닭은?
입력 2013-05-22 17:26
‘산나물의 고장’ 영양으로 떠나는 미각여행
참나물 어수리 곰취 산마늘 참취 비비추 등 일월산의 맑은 공기와 이슬을 먹고 자란 산나물이 향긋한 향을 발산한다. 솜이불처럼 두터운 일월산 눈 속에서 싹을 틔운 산나물이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불과 두세 달. 일자봉의 찬란한 아침 햇살과 월자봉의 은은한 저녁 달빛이 스며 있는 일월산 산나물은 그래서 색도 곱고 향도 더 그윽하다.
‘산나물의 고장’ 경북 영양은 공장 굴뚝 하나 없는 청정지역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경북 북부지역에서도 내륙 깊숙이 위치해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리는 영양은 일교차가 심한 고랭지라 맛과 향이 좋은 산나물이 흔하다. 산자락을 깎아 만든 손바닥만한 밭뙈기에서는 뻐꾸기 소리를 장단삼아 산나물을 채취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영양의 산나물은 태백산맥에서 곁가지로 뻗어 나온 일월산과 풍력발전단지로 유명한 맹동산이 주산지이다. 그 중에서도 일월산은 외씨버선처럼 산세가 부드럽고 정상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어 접근성이 좋다. 그래서 숲이 연초록으로 물드는 오뉴월에는 산나물을 채취하는 아낙들의 탄성으로 일월산은 더욱 활기를 띤다.
읍내에서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향인 주실마을을 향해 달리다 일월면 소재지에서 31번 국도로 갈아타면 외씨버선길 제7코스 시작점인 일월산자생화공원이 반긴다. 외씨버선길은 경북 청송에서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 이르는 240㎞ 길이의 도보여행길. 보일 듯 말 듯 산과 숲을 넘나드는 도보여행길이 조지훈의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을 닮았다고 해서 명명됐다. 외씨버선은 오이씨처럼 볼이 조붓하고 갸름해 맵시가 있는 버선.
철쭉을 비롯해 수십 종의 야생화가 피고 지는 일월산자생화공원에는 일제의 수탈현장으로 산자락을 깎아 만든 제련소 구조물이 그때의 생채기인양 아직도 남아 있다. 일제는 1939년 광물 수탈을 목적으로 일월산에서 채굴한 금, 은, 동, 아연을 이곳으로 옮겨 제련했다. 채산성 악화로 1976년 문을 닫을 때까지 비소 등에 오염된 제련소 주변과 침출수가 흘러든 반변천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30년 이상 방치되던 죽음의 땅과 하천이 생명의 땅으로 거듭난 때는 2001년. 영양군이 토양오염 방지를 위해 오염원을 밀봉하고 일월산에서 자생하는 야생화를 옮겨 심어 들꽃의 천국으로 만든 것이다.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시작하는 외씨버선길에 ‘치유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상처받은 땅이 자연의 넉넉한 품에서 어떻게 치유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일원산자생화공원에서 31번 국도와 헤어진 외씨버선길은 일월면 용화2리 대티골로 들어선다. 대티골은 일월산 깊은 산속에서 살던 화전민들이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소개되면서 일군 산촌마을. 요즘은 명이나물로 불리는 산마늘 등 산나물을 재배하고, 깨끗하게 단장한 황토집에서 민박을 하면서 부농의 꿈을 꾸고 있다.
외씨버선길은 대티골 입구에서 옛 31번 국도인 ‘아름다운 숲길’로 들어선다. 영양과 봉화를 연결하는 영양터널이 뚫리기 전 일월산 자락을 구불구불 달리던 옛 31번 국도는 1939년 일제가 일월산에서 채굴한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만든 산길. 삽과 곡괭이뿐인 이 땅의 노동자들을 동원해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길을 냈던 것이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 길이 다시 태어난 때는 제주올레길이 등장하기 1년 전인 2006년. 대티골 주민들이 옛 기억을 되살려 길을 잇고 다듬은 후 ‘아름다운 숲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최근에는 이 길이 외씨버선길과 이어지면서 주말에는 도보여행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자동차 한 대가 넉넉하게 지나갈 정도로 넓은 숲길은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다. 아름드리 금강송이 수묵화를 그리는 길섶에는 온갖 산나물들이 한주먹씩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산나물의 향긋한 맛을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고갯마루. 산길 한쪽에는 ‘영양 28㎞’라는 옛 국도의 녹슨 이정표가 홀로 고갯마루를 지키고 있다.
대티골로 하산하는 칠밭목 삼거리를 지나면 ‘아름다운 숲길’은 끝이 나고 외씨버선길은 영양과 봉화의 경계인 재산면 우련전까지 이어진다. 칠밭목은 칡이 산을 뒤덮어 일부러 심어놓은 밭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우련전에서 일월산까지 시멘트로 포장된 약 6㎞ 길이의 구불구불한 임도를 달리면 이내 군부대가 위치한 정상 부근에 닿는다.
일월산(日月山)은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와 달을 가장 먼저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산세는 하늘에 닿을 듯 우뚝 솟아 웅장하고 거대하지만 산정은 평평한 육산이다.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시골 아낙을 닮은 순한 산이라고 해서 주민들은 순산(順山)이라고도 부른다.
맑은 날에 울릉도가 보인다는 일자봉(日字峰)은 일월산(1219m)의 주봉으로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다. 일자봉 서쪽에 위치한 해발 1210m 높이의 월자봉(月字峰)은 통고산과 청량산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봉우리로 주변에는 우리나라에 가장 넓은 피나물 군락지가 숨어 있다. 어둑어둑한 숲 속을 환하게 밝힌 피나물의 노란색 꽃은 밤하늘의 별이 모두 내려앉은 듯 황홀해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일월산 최대의 산나물 군락지는 군부대 앞에 위치한 드넓은 개활지로 곰취와 어수리를 비롯해 수십 종의 산나물들이 야생화와 함께 군락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일월산에서만 나는 금죽은 맛과 향이 뛰어나 조선시대에는 임금에게 진상했을 정도. 혹은 숲속에서 혹은 길섶에서 그윽한 맛과 향으로 입맛을 유혹하는 일월산의 산나물이 영양 두들마을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밥상에 나오는 것은 산나물에도 ‘품격’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