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폭폭 칙칙폭폭… ‘협곡 속으로’

입력 2013-05-22 17:09


코레일 ‘V-트레인’ 인기 폭발

흰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가 선명한 디젤기관차가 3량의 분홍색 객차를 달고 경북 봉화의 분천역을 출발한다. 장난감 기차를 닮은 이 열차는 이달 초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한 V-트레인. 오지 중 오지인 봉화의 협곡을 달린다고 해서 ‘백두대간 협곡열차’로 불리기도 한다. 기관차 외관이 아기 호랑이를 닮아 ‘아기 백호’라는 애칭을 얻은 V-트레인은 분천∼양원∼승부∼철암 구간(27.7㎞)을 왕복 운행하는 관광전망열차.

기적소리와 함께 영동선 분천역을 출발한 V-트레인은 줄곧 낙동강이 흐르는 협곡을 따라 S자를 그린다. 때로는 철교를 건너고 때로는 터널을 통과하며 시속 30㎞로 느릿느릿 달리는 V-트레인의 차창 밖으로는 ‘원시의 강’으로 불리는 낙동강 상류와 신록으로 곱게 단장한 V자 형태의 협곡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V-트레인은 옛 추억을 상기할 수 있도록 복고형으로 만들었다. 요즘은 보기 드문 접이식 승강문을 비롯해 목탄 난로, 선풍기, 백열전구 등으로 단장한 객차는 옛날의 완행열차를 연상시킨다. 바깥풍경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도록 객차의 천정과 바닥을 제외한 대부분을 유리창으로 만든 것도 특징. 특히 객차 지붕에 설치된 태양열 집전판은 하루 평균 5㎾의 전기를 생산해 기차가 필요로 하는 전력을 얻는다.

V-트레인이 첫 번째로 정차하는 양원역은 봉화군 소천면 냉천리에 위치한 무인역으로 하루 두 차례 무궁화호가 정차하던 곳이다. 손바닥만한 역사 앞을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은 울진군 서면 전곡리 원곡마을.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한마을이나 다름없는 이곳에 열차가 정차한 때는 1988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원곡마을 주민들은 봉화 5일장에 다녀올 때마다 달리는 열차에서 포장한 짐을 창밖으로 던진 후 승부역에서 내려 철로를 걸어 되돌아와야 했다. 마을 주민들이 당시 권력 실세에게 열차를 세워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성금으로 창고 같은 역사를 만들면서 이 마을은 기차로도 접근할 수 없는 오지라는 오명을 벗었다.

양원역에서 승부역까지 4㎞ 구간은 기차가 아니면 접근할 수 없는 유일한 곳으로 낙동강 상류의 비경이 철길을 따라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양원역에서 휴식을 취한 V-트레인은 철교를 건너고 터널을 달려 태백산 자락인 비룡산과 오미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에 둘러싸인 승부역에 도착한다.

승부역은 2000년대 초에 환상선 눈꽃열차가 운행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설경이 아름다운 승부역을 찾는 겨울나그네들을 위해 무궁화호가 서너 차례 한시적으로 정차하는 것을 제외하곤 하루 4번 왕래하는 무궁화호가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승부역이 시나 기행문의 단골 소재로 유명해진 것은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수송의 동백이다’는 짧은 글 때문. 1960년대에 승부역에서 근무했던 어느 역무원이 썼다는 이 글이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기차역으로 부상했다.

승부역과 터널 사이에 위치한 역마을 동구에는 ‘영암선 개통비’가 우뚝 서 있다. 1955년 12월 개통한 영암선은 강원도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영주에서 철암까지 87㎞ 구간에 33개 터널과 55개 교량을 세운 그 시절 최대의 역사. 순수 우리 기술로 건설한 영암선 구간 중 가장 힘들었던 승부역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받아 개통비를 세운 것이다.

1963년 영암선이 영동선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면서 승부역은 1997년 간이역으로 전락했다. 2001년엔 마주 달리는 기차가 교행을 위해 잠시 대기하는 신호장으로 바뀜으로써 간이역이란 명칭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연히 기차표는 열차 안에서 사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V-트레인이 하루 왕복 8차례 승부역을 찾으면서 다시 전성기를 맞은 셈이다

승부역에서 휴식을 취한 V-트레인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승부∼석포 구간의 협곡을 달려 강원도 태백 땅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동점역과 구문소를 스쳐 요즘도 석탄을 실어내는 철암역에서 거친 호흡을 고르며 쉼표를 찍는다.

분천∼철암 구간을 하루 3차례 왕복 운행하는 V-트레인의 첫 열차와 마지막 열차는 영주까지 연장운행한다. 요금은 분천∼철암 8400원, 영주∼철암 1만1700원. V-트레인은 정차역에서 내려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고 다음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특징. 양원역에는 비동승강장까지 2.2㎞(1시간)를 트레킹하는 ‘가호 가는 길’과 양원역에서 구암사를 거쳐 무주암까지 걷는 2.3㎞(1시간) 구간의 ‘수채화 길’이 조성돼 있다. 비동승강장은 양원역과 승부역 사이의 임시 승강장.

승부역에는 참밭골에서 배바위재와 배바위산을 거쳐 비동승강장까지 연결하는 6.8㎞(3시간) 구간의 ‘고요숲길’ 트레일과 승부역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양원역까지 걷는 5.6㎞ 구간 길이의 ‘낙동강 비경길(6월 말 개통)’이 있다. 이밖에도 철암역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두선탄장과 생활사문화관, 벽화마을로 거듭난 폐탄광촌을 거쳐 단풍군락지를 왕복하는 4.5㎞(1시간30분) 구간의 ‘시간을 캐는길 삼방길’이 있다.

한편 코레일은 분천역과 철암역에서 시간별로 차를 빌려 인근 관광지를 둘러보는 카쉐어링 서비스와 함께 자전거 대여 서비스도 하고 있다(코레일 고객센터 1544-7788).

봉화=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