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11) 신약성경 새번역 작업과 ‘기독공보 筆禍사건’

입력 2013-05-22 17:22


신학교 학적부를 되찾고 나서 매월 이자를 납부하고 있던 때였다. 그 고충을 알아준 분이 권세열(Francis Kinsler·미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였다. 내 사정을 알게 된 그는 우선 원금을 갚으라며 돈을 빌려줬다. 권 선교사에게는 이자 없이 원금만 내 월급에서 조금씩 갚아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박봉 탓에 원금 상환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약 2년쯤 지나서 권 선교사는 돈을 빨리 좀 갚아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급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울 동교동 집을 팔아 빚을 갚은 뒤 서울 주자동에 방 한 칸짜리 전세를 얻었다.

당시 성경번역 작업을 하던 나로서는 종로에 있는 대한성서공회에 출근하기가 오히려 편리한 곳이었다. 성서공회는 당시 신약 새번역 작업을 계획하고 나를 전문 초역자(初譯者)로 발탁했다. 초역에만 4년이 걸렸다.

신약성경 새번역 작업은 시련과 열매를 동시에 가져다준 과정이기도 했다. 번역 작업을 앞두고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①쉬운 현대말로 번역한다, ②기존에 표기되어 있던 ‘인자(人子)’를 ‘사람의 아들’로 고친다, ③예수님의 말씀을 ‘해라’조가 아닌, 보통 사람의 말로 한다는 것 등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는 보통 인간의 말을 하셨을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말투로 고쳐 표현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 내용이 교단 신문인 기독공보에 실리자 발칵 뒤집혔다. 1961년 장로교 총회석상에서 한 총대 목사가 들고 일어나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기독공보 필화(筆禍)사건’은 장로회 신학교 내부에까지 나에 대한 찬반 논란을 야기했다. 경찰이 동원될 정도로 격렬한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이 때문에 나는 1년 동안 장신대 교단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정직 기간은 또 다른 열매를 맺는 시기이기도 했다. 성서공회 성경번역 초역 및 번역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내서 신약성경 헬라어 교본을 만들었다. 이것은 ‘헬라어-한글사전’을 만드는 계기로 이어졌다.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시도하지 못했던 작업들이었다. 이뿐 아니라 신약성서 개론과 신약성서신학 등 교과서 집필까지 할 수 있었다.

성서공회의 성서번역 작업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68년 즈음에는 한국천주교회의 요구를 받아 성서공동번역 작업에도 참여했다. 개신교 대표로 참여했던 나는 신약성경 번역을 맡았다.

이에 앞서 1966년 가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신학을 알면 알수록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신·구약 성경 중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해야겠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박사학위도 요구될 것 같았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는 다시 나를 전액 장학생으로 선정, 프린스턴 신학교로 보내줬다. 1년 만에 석사학위를, 윗워드(Whitworth) 장로교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나 홀로’ 유학시절, 한국에 있던 맏아들 때문에 아내의 마음고생이 심했다. 아들의 예상치 못한 탈선 때문이었다. 내가 귀국한 뒤 결국 우리 부부는 고민 끝에 인도네시아 선교사를 지망했다. 1948년부터 23년 동안 섬겨왔던 장로회신학교를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과 더불어 군 입대를 앞둔 맏아들의 자립과 회복을 위해서였다. 그를 한국에 남겨두고 떠난 때가 1971년 9월. ‘인도네시아에서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떠났지만 3년 만에 귀국을 하고 말았다. 당시 장로회신학교 학장이었던 이종성 박사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