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형선] 환자 의료비 부담 줄이려면
입력 2013-05-21 19:31
세계보건기구(WHO)는 보편적 의료보장 달성을 위한 세 가지 전략을 내세웠다. 첫째는 의료보장 대상인구를 넓히는 것, 둘째는 적용 의료항목을 많이 하는 것, 셋째는 환자부담률을 낮추는 것이다. 건강보험만 보자면 이 세 가지 축을 결합한 것이 ‘건강보험보장률’이다.
우리나라는 1977년 의료보험을 시작한 이후 12년 만인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 시대를 열었다. 첫째 전략인 대상인구의 확대를 일찍이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이다. 첫째 전략은 세 전략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이다. 이를 달성하지 못해서 의료제도 전반이 심하게 뒤틀어져 있는 것이 미국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를 부러워하는 것은 바로 이 첫 번째 전략의 성공 때문이다.
우리가 전국민건강보험 시대를 연 지도 벌써 4반세기가 지나간다. 참여정부 이래 이명박 정부를 거쳐서 현 정부까지 건강보험의 최대 화두는 ‘보장성 강화’다. 환자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자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매년 40조원에 가까운 돈을 건강보험료 등으로 걷어서 건강보험 혜택을 주고 있다. 하지만 건강보험보장률은 2007년 65%에서 2011년 63%까지 떨어졌다. 많게는 4조원씩 매년 공단의 재정부담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보장률이 낮아진다. 왜 그럴까. 의료비 규모가 더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비 지출 때문에 빈곤으로 빠지는 가구의 비율은 불명예스럽게도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고서도 부러워할지 염려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WHO의 나머지 전략을 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적용 항목’의 확대다. 일부 항목의 본인부담률을 낮추는 데 많은 돈을 쓰기보다는, 같은 돈으로도 건보급여에서 빠지는 항목을 더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암과 심뇌혈관질환은 본인부담률이 5%이고 희귀난치성질환은 10%이다. 하지만 이는 건강보험 적용이 되는 서비스의 경우이고 일부 고가 항암제와 같은 경우는 암환자도 본인이 100% 부담해야 한다.
현 정부는 이러한 ‘비급여’ 항목을 급여화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때 100% 본인부담에서 5∼20%로 일거에 낮추는 방식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면 오히려 급여화가 어려워진다. 보험재정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본인부담률을 다양화하는 전략이다. 기존에 환자가 100% 부담하던 항목 중 일부는 80%, 일부는 50%, 일부는 5∼20% 등 차등적으로 본인부담률을 낮추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환자를 위한 많은 혜택이 마술처럼 생겨나게 된다. 첫째, 비급여로 되어 있을 때보다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의료제공자의 모럴해저드가 줄어 꼭 필요한 경우만 그 서비스를 권유하게 될 것이다. 둘째, 같은 보험재정으로도 많은 항목을 급여화할 수 있게 된다. 급여화하는 순간 공단이 80∼95%를 부담하는 경우와 비교해보자. 셋째, 필요서비스는 낮은 본인부담률 그룹에 넣어서 환자의 부담을 크게 낮출 수 있고, 반면에 모럴해저드가 생기기 쉬운 항목은 본인부담률 높은 그룹에 넣음으로써 환자의 재정책임성을 높일 수 있다. 넷째, 급여권 안에 들어온 항목은 의료의 질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본인부담 차등화는 국내외에 다양한 사례가 있다. 보통의 입원서비스는 본인부담률이 20%이지만, 식대는 50% 환자부담이다. 노인틀니에 대한 본인부담률도 50%다. 필수성 정도, 보험재정에 대한 영향 등을 고려해서 차등 적용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필수적이고 고비용인 약은 본인부담 0%(백색줄무늬 라벨), 보통의 의약품은 35%(백색), 경증용 의약품은 65%(청색), 영양제 등은 100%로 환자부담 수준을 차등화하고 있다.
정형선(연세대 교수·보건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