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도 乙 나름… 금융권 “甲노릇 하는 乙 때문에 갑갑”

입력 2013-05-21 18:48


최근 ‘갑(甲)’의 횡포가 주목받으면서 거꾸로 고통을 받는 ‘힘없는’ 갑들이 등장하고 있다. 정당한 업무처리에도 불만을 품고 떼를 쓰는 ‘을(乙)’ 때문에 몸살을 앓는 감정노동자들이다.

특히 최근 금융회사들이 ‘갑’으로 지목받으면서 창구에서 이유 없이 분노하거나 횡포까지 부리는 고객이 많아지자 은행 직원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A은행은 최근 일선 지점장들에게 월 30만원의 ‘묻지마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른바 ‘진상 고객’ 처리 비용이다. 갑을 관계가 주목받자 덩달아 창구에서 막말과 협박을 일삼는 고객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달래기 위한 것이다.

이달 초 서울의 A은행 지점에서 50대 남성이 창구 여직원에게 “펀드 손실을 물어내라”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은행에서 가입한 펀드 금액은 모두 1000만원. 그러나 유럽 재정위기 등으로 수익률이 -30% 아래로 내려앉자 무작정 원금을 내놓으라며 떼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해당 지점장이 “택시 타고 가시라”며 5만원의 교통비를 지급한 뒤에야 그는 되돌아갔다.

이외에도 “지점에 주차장이 없어 불법주차를 했다가 단속을 당했다”며 과태료를 요구하거나, 여직원에게 성희롱 성격의 발언을 일삼는 고객들도 부지기수다.

A은행 지점 관계자는 “어떨 때는 30만원으로도 부족해서 지점장이 사비를 털어 해결하는 경우도 많다”며 “은행 지점들을 돌면서 이런 식으로 돈을 뜯어내는 사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매일 은행 지점 10곳에서 5만원씩만 받아내도 50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B은행은 아예 ‘진상 고객’에 대한 행동 요령을 최근 문서로 각 지점에 내려 보냈다. 먼저 은행 지점이 공공장소임을 알리고 진정해주기를 정중히 요청한다. 그래도 안 되면 정당한 요구는 수용되지만 부당한 요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다소 강하게 전달한다. 다음으로는 업무방해죄·모욕죄·통신매체이용음란죄 등을 언급하며 형사 처벌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그래도 고객이 막무가내일 경우 경찰에 신고토록 안내했다. 다만 공문의 마지막에는 이런 당부사항이 덧붙여 있다. ‘이런 조치가 오히려 더 고객의 화를 돋울 수 있으니 유의할 것.’

B은행 관계자는 “아무리 공문에 안내된 대로 고객을 응대한다고 해도 작정하고 항의하러 온 고객을 진정시키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고객이 무작정 고함을 지르거나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있는데 정말 참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