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소원의 응답이 늦어질 때
입력 2013-05-21 17:36
창세기 16장 1∼16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나이는 점점 많아지고 자식을 얻을 전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초초해진 아브라함 부부는 당시 풍속대로 자식을 얻을 궁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제안에 따라 여종인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게 됐습니다. 그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하지만 이는 실수였습니다. 이유는 아브라함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어제의 신앙인이 오늘의 불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겠노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던 신앙고백이 힘든 상황이 닥치자 불안 속에서 헤맨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아브라함을 정죄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실수는 곧 우리의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경 본문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초조함과 답답함이 일을 오히려 그르쳐 버리는 경험이 우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빨리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현대인의 죄악 가운데 하나가 너무 바쁜 것입니다. 바쁜 것이 좋은 것일 수 있지만 바쁘므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면 이것은 엄청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쁜지, 항상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디서 좋은 소리가 들려오는가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모두 우리에게 유익한 소리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위기에 처하면 살길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궁지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솔깃한 제안이 성경적인가 검토한 흔적이 있습니까. 기도의 씨름이 있었습니까. 2절은 어떻게 끝납니까.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으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으니라.’ 이런 기록이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셋째,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 해야 합니다. 인간이 수렁에 빠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길을 찾습니다. 우선 살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수단은 결코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교훈을 배우는 것이 인간은 어찌 그리 더딘지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출발입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잘못된 수단을 사용할 때 그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러면 정당한 수단을 사용하십시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은 행위는 목적이야 어찌됐건 명백한 간음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얻자마자 당장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자식을 얻었다.’ 그러나 해결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문제가 더 복잡해지고 더 커다란 문제를 만드는 불씨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해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 하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정운철 용인 함께하는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