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10) ‘3000만원 사건’ 통해 장로교 분열 주범을 보다

입력 2013-05-21 17:35


‘3000만원 사건’으로 사표를 낸 박 박사의 구명운동 과정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등장한다.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WCC 회원교단으로서 에큐메니컬(교회일치·연합) 정신으로 교계의 연합사업에 동참하던 시기였다. 동시에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와 그 활동들도 한국에 조금씩 소개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일부 신학생들 사이에서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박 박사의 사표를 두고 에큐메니컬 진영의 음모라는 등 엉뚱하게도 에큐와 복음주의 진영 간 싸움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이 사태를 통해 한국 장로교를 분열시킨 주범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맹신과 무지, 그리고 욕심이다. 인간 사고체계 중 하나로 사물을 직관적으로 판단해버리는 습성이 있다. 사람의 오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모두 사실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해 버리는 태도다. 즉 사람이 만든 교리를 성경 말씀 이상으로 맹신하고 있다는 말이다. 욕심에서 비롯된 주장이나 견해를 맹종하는 것 또한 큰 문제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조금 다른 점이 있어도 용납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의 판단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용인하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아직도 장로교단의 분파가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저마다 품고 있는 ‘정통주의’를 성경보다도 우월한 위치에 두고 그 잣대에 안 맞으면 배척하고 따로 일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1959년에 장로교가 통합총회와 합동총회로 갈라진 사실이 대표적이다. 교단이 둘로 쪼개지면서 그해 가을 신학교 또한 총회신학교(현 총신대)와 장로회신학교(현 장신대)로 갈라졌다. 장로회신학교는 1959년 말, 대광학교로 잠시 옮겼다가 1961년 현재의 서울 광장동 신축교사로 이사했다.

하지만 앞서 모든 집기와 문서는 총회신학교 측으로 실려 갔다. 가장 중요한 학적부도 그쪽으로 가버렸다. 따라서 성적표를 작성해야 하는 우리 쪽(장신대) 학생과 교수들은 총회신학교에 가서 관련 서류를 받아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장로회신학교 학생과장을 맡고 있던 나에게 연락이 왔다. 총회신학교 사무장인 K집사였다. 한때 옆집에 살던 이웃으로 가깝게 지내던 분이었다. 그가 만나자고 했다. 서울 반도호텔에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하던 중에 그가 어려운 형편에 처한 얘기를 들었다. 지인의 선거운동을 돕다가 빚더미에 앉았다는 것. 빚은 17만원 정도였다. 나는 덜컥 갚아주겠다고 말했다. 그 당시 내가 월급을 2곳(장신대·대한성서공회)에서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물었다. “목사님, 저에게 무언가 요구하시는 것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선의로 돕겠다는 겁니다.”

“목사님, 사실은 신학교 학적부가 제 집에 보관돼 있습니다. 그건 장로회신학교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박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주시면 받지요.”

그리고 학적부를 받을 날짜와 장소를 정한 다음 헤어졌다. 나는 곧바로 신학교로 달려가서 당시 학장이었던 계일승 박사와 사무장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그들은 숙고 끝에 학교가 책임지고 17만원을 마련키로 했다고 알려줬다. 학적부를 받기로 한 전날 밤, 계 학장과 사무장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 돈을 내놓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화가 났다. ‘나 단독으로라도 감행해야겠구나’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그날 밤중에 옆집 처형 댁을 찾아가 17만원을 월 5부 이자로 빌렸다. 그렇게 해서 학적부는 장신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일 때문에 집을 팔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