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안동현] 엔저의 새로운 국면
입력 2013-05-21 19:20
엔화가 강력한 저항선이던 달러당 100엔을 돌파한 후 103엔까지 추락했다. 올여름이나 돼야 100엔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예상보다 조금 빠른 속도다.
100엔이 강력한 저항선으로 작용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100엔과 같이 숫자의 앞자리가 바뀌는 수준에서 심리적 저항이 형성되는 효과(big figure effect)를 들 수 있다. 둘째, 전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가진 파생상품으로 알려진 PRDC(Power Reverse Dual Currency)란 상품이 있다. 엔화를 기초로 하는 구조화 상품으로 서브프라임 위기 전 엄청난 규모로 발행되었는데 엔화가 100엔을 돌파할 경우 이들 상품의 듀레이션(원금 회수기간)이 장기에서 단기로 줄어듦에 따라 발행사가 헤지 포지션을 대폭 변경해야 하는 애로가 있어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100엔은 강력한 저항선이 될 수밖에 없다. 대개 심리적 저항선이 그렇듯 일단 돌파가 되면 다음 저항선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다음 저항선은 110엔이다.
다만 이제부터는 엔화 약세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는 것 같다. 먼저 최근 일본 경제 각료들의 발언에 미묘한 변화가 관측되고 있다. 예를 들어 아마리 경제상은 “엔화 약세가 지속될 경우 국민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는 발언을 통해 속도 조절 가능성을 시사했다. 사실 엔저는 일본 경제에 양날의 칼이다. 수출을 진작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 경제에 수입물가 상승요인이 된다. 110엔 언저리까지는 전자가 후자를 상회해 전체적으로 엔저가 일본 경제에 양의 효과를 가져오지만 110엔을 돌파할 경우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불어 엔저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들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우려로 속도조절론이 조심스럽게 언급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현상이 미 달러화의 강세다. 최근 발표된 미국경제지표가 계속해서 호조를 보이면서 양적완화의 조기종료가 언급되고 있다. 지난주 발표된 소비자심리지수나 경기선행지수가 예상보다 좋은 수치를 보였다. 경기후행지수로 알려져 있는 실업률도 7.5%로 1년 전에 비해 0.6%나 하락했다. 이에 따라 연준 주위에서는 비정상적이고 부작용이 많은 양적완화 정책에 대한 축소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다. 여기에 유럽중앙은행(ECB)이 마이너스 금리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유로화가 약세를 보임에 따라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의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가 2010년의 그리스 사태 이후 최고 수준인 85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과는 달리 안전자산 회귀 현상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경기회복 기대감에 따른 달러 강세로 그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앞으로 엔저 현상은 일본통화당국의 주도뿐 아니라 달러화 강세에 의해 진행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 엔화 약세의 키를 아베뿐 아니라 버냉키도 쥐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엔화의 수준을 결정하는 데 있어 일본 정부의 장악력이 약화돼 잘못하면 의도치 않게 엔화 약세가 너무 나갈 가능성이 있다. 일본 정부는 내심 110엔 근처까지만 엔화 가치가 떨어지길 원하지만 미국의 경기회복이 빠르게 진행될 경우 달러 강세로 인해 엔화 가치는 원치 않게 이를 넘을 수 있다. 110엔이 돌파되고 120엔 이상으로 추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럴 경우 일본 국채 투매와 엔캐리 급증으로 240%가 넘는 국가 부채를 안고 있는 일본 경제가 붕괴될 수도 있다. 소로스가 일본경제 위기론을 제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엔저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우리 경제로서는 110엔까지는 엔저로 인한 피해가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거시경제 정책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엔저가 달러화 강세로 인해 지속될 경우 원화가치 역시 동반 하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연적 헤지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너무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안동현(서울대 교수·경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