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이러다 장기불황에 빠지는 거 아냐?

입력 2013-05-21 19:20


“경제주체들에게 활력 불어넣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무기력증에 빠지고 말것”

우리 경제가 3년 연속 잠재성장률을 밑돌아 일본의 장기불황을 닮아가는 게 아니냐는 논의가 꾸준히 이뤄졌다. ‘일본자본시장연구회’에서도 지난해 말 같은 주제로 토론을 했었다. 20여년 전 일본과 지금 한국이 유사성은 있으나 일본식 장기불황으로는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부동산시장 하락세 지속, 고령화, 제조업 공동화 등은 유사성이 큰 것으로 거론됐다. 하지만 한국의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 대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 양호한 재정건전성 등은 일본과 크게 다르다. 구조적으로 취약한 내수, 비대해진 가계부채, 일자리 부족 등 불안 요인도 산적해 있으나 적절한 정책수단을 동원한다면 크게 걱정할 게 아니라고 봤다.

그런데 요즘엔 너무 낙관적으로 봤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같은 연구회의 월례모임을 마치고 나오면서 회원들 사이에서 툭 터져 나온 말은 이랬다. “이러다 우리도 장기불황으로 빠지는 거 아냐?” “그러게, 경제사회 전반에 활기가 떨어지고 있어요.” “한국판 장기불황의 시작일까요.”

아마 최근 경제가 약진하고 있는 일본과 새 정부가 출범했는데도 딱히 기대감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한국 간의 반전된 모습이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일본 경제는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가 본격 가동되면서 엔저를 통한 수출기업들의 순익이 급증하고 주식시장은 연일 상승세다. 반면 한국의 새 정부는 창조경제, 경제민주화, 고용률 70%, 복지확충 등 아직까지 ‘공약성 슬로건’을 정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실 아베노믹스는 현 단계에서 성공 여부를 따지기 어렵다. 대대적인 양적완화가 엔화 약세를 유도하면서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은 커졌지만 풀린 돈이 어떤 경로를 거쳐 시중에 흘러갈 것인지, 경제주체들이 실제로 돈을 대출하거나 지갑을 열어 투자와 소비를 늘릴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현재 주식 등과 같은 일부 자산 가격이 오르고 있으나 소비가 확연하게 늘었다는 보고도 아직 없다.

또 엔저로 인한 에너지수입액이 폭증해 올 1분기 무역적자 규모는 2조7789억엔으로 전년 동기보다 79.7%나 늘었다. 지나친 엔저가 부담이 된다는 목소리가 정부 내부에서 흘러나온다. 이뿐 아니라 올 들어 장기금리가 상승세를 보이고 있어 천문학적 규모의 국가부채를 끌어안고 있는 일본 정부로서는 이자부담 압력 증가가 또 다른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아베 내각이 70%대의 높은 지지율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정체됐던 일본 사회에 활력과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가 당초 구상대로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변화에 대한 도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추진력으로 국민 앞에 설득력 있게 호소하고 있음은 정권의 존속 차원에서도 유리할 것이다. 다만 높은 지지율에 취한 듯 역사왜곡에 몰두하는 아베 총리의 행태는 하수(下手) 중의 하수다.

박근혜 정부도 이제는 슬로건에서 벗어나 국민이 쉽게 이해하고 기대할 수 있는 선 굵은 정책을 보여줘야 한다. 고령사회에 대비한 복지수요의 확충은 시대적 과제로서 빼놓을 수 없지만 그것은 정부 지출 쪽만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출의 근거가 되는 경제주체들에 대한 활력 불어넣기도 함께 이뤄져야 바람직하다.

더구나 요 몇 년 새 건설, 조선, 해운, 석유화학, 철강, 시멘트 등의 산업분야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올 3월 말 현재 국내 은행들의 부실대출 규모는 20조원을 웃돌고 있다. 복지지출이냐 세입확보냐를 따지는 것 이상으로 기업부채관리, 즉 기업구조조정 문제가 시급해졌다.

여기에 통상임금 내역을 둘러싸고 노사 대립이 치열해지고 있어서 조율에 실패하면 노사 대립, 갈등 확산으로 우리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이게 바로 한국판 장기불황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새 정부가 공약슬로건에 연연하지 말고 내실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