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명호] 대통령이 또 사과 안 하려면

입력 2013-05-20 19:00


노태우 대통령 시절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인사가 들려준 뒷얘기. 당시 장관이나 정부기관장, 고위직 인선 때 자주 세간의 평(評)을 주요 기준의 하나로 삼았다. 청와대나 여권 핵심 인사가 유력 후보의 평판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 기자들에게 슬쩍 흘리는 것이다.

일단 활자화되면 경쟁적인 후속 보도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하자가 드러나면 탈락한다. 일종의 비공식적 평판(評判) 인사 과정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치적 암투다. 주요 보직 인선이 진행될 때 특정 세력이 반대파의 유력 후보를 탈락시키기 위해 이름 석자와 함께 여자나 재산 문제 같은 치명적 약점을 함께 흘리는 것이다. 대개 정보기관이나 내부 인사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 해당자는 결국 만신창이가 되면서 후보군에서 탈락한다. 당시 이런 과정 때문에 황망히 무대 뒤로 사라져간 유력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비공식적인 평판 인사를 공식적으로 끌어올린 게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다. 청와대에 인사수석비서관을 둬 정무직 후보들의 평판까지도 점검했다. 주요 공직이나 공기업 인사라는 게 정권 입맛대로 흐르기 마련이지만, 당시 청와대가 결정하는 인사는 시스템적으로 비교적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b>나홀로 인사는 실패 확률 높아

이명박 대통령 때에는 대선 논공행상을 기록한 ‘치부책’이 있었다고 한다. 여권의 친박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내부적으로 논공행상에 따른 자리다툼이 치열했다. 장관(급)은 대통령 의중이 절대적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금융기관이나 공기업의 사장이나 감사,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알짜배기 자리에는 목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래서 치부책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순번을 관리하는 권력 핵심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 치부책의 순번대로 자리를 차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첫 국무회의에서 “국정철학 공유”를 강조하며 공공기관장 교체를 시사한 것은 이런 상황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농담조로 이런 얘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 때는 ‘힘 센 관리자’가 있어 자리가 질서 있게 배분됐는데, 지금은 그런 기능을 가진 사람이 없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고나 할까.”

박 대통령이 지난주 언론사 정치부장들과의 만찬에서 윤창중 성추문 이후 인사와 관련해 “조금 더 다면적으로 철저하게 검증하고 제도적으로 검증하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불통·나홀로·수첩 인사에서 평판도 들어보겠다는 것이다.

b>내부 평판이 중요한 기준 돼야

사실 평판이란 게 근거가 희박하고 부풀려지거나, ‘∼카더라’ 통신이거나, 의도적인 마타도어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이를 걸러낼 장치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사심 없는 대통령의 핵심 참모들이 할 일이다. 대통령 혼자서는 최적의 인사를 할 수 없다는 게 몇몇 인사 실패 사례의 교훈이다.

미국의 한 헤드헌팅 연구소는 CEO 평균 연봉을 11만 달러로 봤을 때 채용 실패에 따른 정보 유출, 기회비용 상실, 이미지 실추 등으로 야기되는 비용을 271만 달러로 산출했다. 능력도 없이 맹목적 충성심만 있다거나 능력은 되는데 공(公)보다 사(私)를 먼저 챙기는 사람, 학교나 지역에 치우쳐 붕당(朋黨)정치를 일삼는 사람들이 주요 공직에 간다면, 그 폐해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

결국 인사 실패를 줄이는 주요 관건 중 하나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판을 참고하는 것이다. 특히 내부 평판이 중요하다. 내부 평판은 그 사람의 장단점을 수렴해 준다.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을 또 제가 언제 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이 이 말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약이 되고 독이 될 수도 있는 평판을 잘 활용해야 한다.

김명호 편집국 부국장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