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성낙] ‘歷史나무’에 열린 두 개의 다른 열매

입력 2013-05-20 18:53


“일본과 달리 역사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과거사 반성한 독일”

독일 사람에게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비스마르크가 세계 최초로 도입한 복지정책을 꼽는다. 독일에서 지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필자에게 묻는다면 서슴없이 “과거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독일 국민과 국가가 일관되고 단합된 모습으로 보여준 반성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하겠다.

독일 사회가 나치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면서 지난날의 치욕적인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다짐하는 모습의 일면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이런 그네들의 변함없는 행적은, 옛 적대국이었던 주변국이 독일 통일 과정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되었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저렇게 사과를 안 하겠다는데 왜 자꾸 집요하게 사과하라고 하느냐?”고 언젠가 재불 교포가 불평스럽게 말했다. 그의 음색에는 ‘그 모자란 자들인데, 지겹지도 않느냐’라는 뜻과 ‘옆구리 찔러 받는 사과, 그 무슨 역사적 의미가 있겠느냐’는 의미가 스며 있었다.

하기야 지겹기는 우리도 매일반이지만 용서할 수 없는 우리네 ‘사회적 응어리’를 그는 덜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너무도 다른 공간이 주는 사회성의 차이 때문일 수 있겠고, 아마도 과거사에 대한 독일의 솔직한 반성을 이웃나라에서 보면서 상대적으로 ‘짜증스럽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근래 한·일 간의 역사관이 사회이슈로 부각되고 ‘독일의 예’가 자주 인용되면 가끔 필자가 체험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1995년 5월 1일 독일의 2차 대전 패망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당시 독일연방공화국 로만 헤어초크(Herzog) 대통령이 “우리는 과거 나치 독일이 저지른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만행을 조금도 미화함 없이 후세대에 전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한 사실도 기억에 남는 일이지만, 독일 패망 이후 새로운 독일이 우리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의 역사교육에서부터 과감한 정리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필자는 더욱 큰 아름다움을 보았다.

1960년대 초 독일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독일 친구들이 나치 과거사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을 느꼈다. 자기들의 ‘아픈 과거사’라 그러려니 했다. 몇 년이 지나 비슷한 계기에 독일 친구가 역시 같은 반응을 보여 조용하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전후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나치 독일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워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 밖의 답변이었다. 필자는 6·25 동란사를 분명 고교시절 역사시간에 배웠기에 더욱 의아해했다.

수년 전 바로 그 친구에게 요즘도 독일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나치 독일에 대해 가르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왜 아니 배우겠냐고 놀라워하기에, “오래전 네가 학교에서 나치 만행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그야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역사교육 담당 교사들은 필연적으로 나치 시대를 몸소 격하게 체험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치 관련 역사를 학생들에게 객관적으로 전달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교육당국이 정책적으로 현대역사를 교육목록에서 아예 배제했다”고 설명했다.

실로 참신한 교육의 역동성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사에 대한 독일 국가와 국민들의 철저한 반성의지를 향한 공감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 국민의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경외심이 있었기에 화려한 수사에서 끝나지 않고 범국민적 반성이 따를 수 있었겠다는 사실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패전국이 된 동시대의 두 나라, 독일과 일본이 역사학이란 동일토양에서 자란 ‘과거사 나무’에 결실한 ‘반성 열매’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역사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차분히 되돌아본다.

이성낙(가천대 명예총장·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