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9) 전란중 떠난 美유학 “아! 신학이 이런 거였구나”
입력 2013-05-20 17:27 수정 2013-05-20 18:06
1951년 5월 21일 부산 대청동 중앙교회에서 장로회 총회가 열렸다. 직전 해 4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비상 정회된 총회의 속회였다. 그 총회에서 신학교 합동안이 통과됐다.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하나로 합친다는 내용이었다. 교명도 총회신학교로 개칭한다는 것이었다. 한쪽의 반발, 즉 조선신학교 측이 강하게 반기를 들었다. 급기야 교단을 탈퇴(한국기독교장로회 창립)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신학교는 이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으로 바뀌었다.
부산의 장로회신학교는 4회 졸업생을 내고 폐교했다. 1951년 7월 부산진교회 예배당에서 4회 졸업식이 열리고 같은 해 9월 대구 남산동 미국장로교선교사 사택단지의 한 동에서 ‘총회신학교’가 문을 열었다.
나는 대구의 신학교에서 약 1년간 헬라어를 가르쳤고, 부산에서 열린 함해노회에서 목사안수도 받았다(1952년 3월 26일). 그 즈음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실시한 교회지도자 양성 프로그램 참가자로 발탁돼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다. 유학 준비를 마치고 나서 박형용 박사님을 찾아가 출발 인사를 드렸다. 그때 그가 당부한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 학교에 성경 교수가 없으니 이것저것 다 해 가지고 오시오.”
신·구약을 모두 공부하고 오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맏아들(명진)을 낳은 지 보름도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아내와 아들이 눈에 밟혔다. 온 국민이 전란에 시달리고 있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가 전액 장학생의 신분으로 모두가 동경하는 미국의 한복판에서 공부를 하다니.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뉴욕 맨해튼 49가에 자리 잡은 비블리컬(Biblical) 신학교는 학문보다는 경건을 위주로 한, 한마디로 경건훈련장 같았다. 13층짜리 건물 한 동에 예배당과 교실, 도서관, 기숙사, 사무실이 모두 모여 있었다.
1년 동안의 뉴욕 신학교 생활을 마친 이듬해에는 프린스턴 신학교로 옮겼다. 한태동, 김윤국, 문동환 등 여러 명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비블리컬 신학교가 경건에 무게를 뒀다면 이곳은 말 그대로 ‘학문의 전당’이었다. 신·구약 과목을 등록하고 고급 희랍어 강의도 들었다. ‘학문이란 이런 것이구나’ 윤곽을 잡는 시기였다고 할까. 지금까지 한국에서 배웠던 신학 교육과는 딴판이었다. 정통 보수주의의 약점을 깨닫는 동시에 성경을 학문적으로 충실하게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깊이 되새기는 시기였다.
약속된 2년의 유학 기한이 찼다. 이것저것 다 배워오라는 박형용 박사님의 말씀이 계속 맴돌았지만 한 마리 토끼도 잡지 못했다. 신약이나 구약 석사학위도 얻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장로회신학교는 1953년 박형용 박사가 2대 교장으로 취임한 뒤 서울 남산으로 다시 옮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신대 학생 수가 600명을 넘어섰다. 남학생들의 병역이 면제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늘어난 학생들을 위해 새로운 학교 부지를 찾는 게 급선무가 됐다. 하지만 부지 매입 과정에서 일이 터졌다. 토지중개 등을 위해 소위 ‘교섭 비용’으로 들어간 비공식적인 돈이 3000만원에 달했던 것. 지금으로 치면 수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른바 ‘3000만원 사건’으로 박 박사는 사표를 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그 사건을 통해 한국 장로교회를 분열시키는 주범을 목격하게 됐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