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필교] 따뜻한 밥 한 끼
입력 2013-05-19 19:04
지난 동지에 팥죽을 너무 많이 쑤어서 난감했던 한 주부가 있었다. 대가족 생활을 오랫동안 해오다가 3년 전에 분가하다 보니 씀씀이가 큰 탓이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남은 팥죽을 아파트 좌우 옆집과 경비실 두 군데 나눠 주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옆집의 젊은 애기엄마가 묵직한 과일봉지를 건네주며 “그날 몸이 아파서 밥을 못 먹고 있었는데 너무 고마웠어요. 어쩌면 그렇게 진하고 맛있어요?” 하더란다. 그 한마디가 그동안 음식솜씨 없다고 타박 받아온 그분의 마음을 움직였다.
얼마 후에는 친정엄마를 여의고 슬픔에 잠긴 친구에게 갖다 주었다. 그 친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엄마가 해준 것 같다며 손을 꼭 잡았다. 더 용기를 얻어 다음에는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기운 없어 하는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갔다. “고맙다, 친구야. 팥죽을 어떻게 쑤는 거냐. 좋아하지만 할 줄 몰라서 사 먹는다”면서 고등어 두 마리로 답례했다.
받는 이들의 반응 한마디 한마디가 날개가 된 듯 그분의 팥죽 행보는 점점 넓어져 갔다. 요즘은 보름에 한 번쯤 팥죽을 쑨다고 한다. 촉수를 세우니 나눌 일이 자꾸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늦깎이로 대학교를 지난봄에 졸업한 친구, 고관절 수술을 하고 퇴원한 친구, 다이어트하다 큰 병이 난 친구 등등. 직접 만든 팥죽을 받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팥죽 배낭을 메고 다니며 나눈다. 내가 20년 지기인 그분에게 “선생님은 팥죽 테라피를 하시네요”라고 했더니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찾아온 후배와 저녁식사를 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쌓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후배는 위안을 얻었던지 식사 후 “사랑 한 그릇 잘 먹었어요”라고 했다. 요즘 주위에 배가 고픈 사람보다 마음의 허기를 느끼는 사람이 부쩍 많은 것 같다. 마음이 고픈 사람은 식사 때와 상관없이 음식이야기만 나오면 배고프고, 배불러도 자꾸 허기가 지는 증상이 있다고 한다.
“언제 밥 한 번 먹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흔히 건네는 인사말이다. 밥 한 끼는 때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촉매제가 된다. 또한 사랑이 녹아 있는 ‘따뜻한 밥 한 끼’에는 지친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는 힘이 있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 직장 동료가 사준 싹초밥이 그랬다. 그때 따뜻한 밥 한 끼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시린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따뜻한 엄마손 같았다.
윤필교 (기록문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