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창환 (8) 생사의 피란길서도 ‘히브리어 교과서’ 번역만은…

입력 2013-05-19 17:15


지금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1950년 6월 25일, 주일이었던 그날 나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튿날 아침에는 서울 남산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올라갔었다. 멀리 동두천 쪽에서 쿵쿵 들려오던 대포소리도 생생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국군이 잘 싸우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만 연방 내보내고 있었다. 6·25가 터진 직후 학교에는 출석 학생이 많지 않았다.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당시 한국의 미국 선교사들은 ‘적어도 목사들만큼은 남쪽으로 피난시키자’는 계획을 세웠다. 전쟁이 나자마자 많은 목사들이 잡혀서 목숨을 잃거나 이북으로 끌려갔다. 이 같은 위험을 파악한 선교사들은 한국인 목사들과 그 가족들을 트럭이나 열차를 통해 한강을 건너게 했다. 그때 나는 아직 목사가 아니어서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서울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해 도시를 장악한 상태였다. 밤이 되면 종종 공산당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대문에 와서 “이 집에 남자 있어요?”하고 묻곤 했다. 그러던 중 미군과 연합군의 반격으로 서울탈환작전이 시작됐다. 철수를 서두르는 인민군들은 집집마다 뒤져가면서 남자들을 다 잡아갔다. 내가 머물고 있던 명륜동 거처에도 그들이 찾아왔다.

“이 집에 남자 있습니까?”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자진해서 2층에서 내려와 마당으로 나가 10여명쯤 되는 그들을 맞았다. 내가 생각해도 용감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말을 건넸다. “동무들 수고하십니다.” 먼저 인사를 건네자 의아하다는 듯이 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마시오. 이 지역에 비밀 임무를 띠고 와 있는 사람이오.”

“그래도 이름만은….”

“안 되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소.”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위기를 모면했다. 실은 이런 일이 있을지 몰라 맘속으로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 내가 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겠는가.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 이튿날, 국군과 연합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9·28 서울 수복. 장로회신학교가 다시 가을학기를 시작했다. 학교에 나가자 누구는 죽고 다치고 행방불명됐다는 소식과 소문이 무성했다 그런데 몇 달 뒤 북상하던 연합군이 중공군을 등에 업은 인민군의 반격으로 후퇴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소위 ‘1·4후퇴’ 사태로 돌입했다. 신학교 강의는 또다시 중단됐다. 이번에는 한강을 넘어 피난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한경직 목사님께 부탁해 복구된 한강철교를 건너는 마지막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열차는 대구역에서 멈췄다.

거기서부터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부산까지 이동해서 처가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안전을 위해 제주도로 가는 배를 다시 탔다. 그곳에서 처남(현수길)은 미국문화공보원에 자리를 얻어 일하면서 나에게도 일감을 얻어주었다. 매일 발간되는 한국신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그때도 짬짬이 히브리어 교과서(A.B.Davidson)를 번역했다. 촛불을 켜놓고 작업을 많이 해서인지 그때부터 시력이 약해져서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겨울을 보내고 나서 박형용 교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그도 제주 성산포에서 피난 중이었는데 부산으로 가서 피난 신학교를 열자는 말씀이셨다. 제주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으로 갔다. 임시 교사(校舍)로 사용된 부산진교회(당시 김성여 목사)에서의 피난 신학교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