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⑪ 협동조합의 천국
						입력 2013-05-19 17:27  
					
				“협동조합, 박근혜 정부 경제민주화에도 기여할 것”
값싸고 인기 있는 서울의 구립(區立) 수영장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됐다면 우리 시민은 시청에 폐쇄 반대 민원을 넣을 것이다.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독일 시민들은 협동조합을 만들어 이 수영장을 인수한다. 인수비용은 조합원 출자금과 대출로 충당하며, 수영장을 운영해 얻은 수익으로 대출을 상환하고 남은 수익금은 분배한다. 정부·지방자치단체 같은 상부 결정 또는 위로부터의 혁신에 익숙한 우리에겐 낯선 문화다.
언론진흥기금의 후원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라이파이젠협회(DRV·농협연합회) 마린 커란(Mareen Curran) 미디어 담당관은 “국민 4명 중 1명은 협동조합 회원”이라고 말했다. 독일 경제의 기반이 사실상 협동조합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난 3월 25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알고 보면 배경은 매우 슬프다”며 독일에서의 협동조합 태동 계기를 설명했다. 1847년 대기근이 강타하면서 독일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당시 라인강 중류 농촌지역 바이어부쉬의 시장으로 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라이파이젠(F.W.Raiffeisen)이 마을 기금을 조성해 굶주린 주민들에게 곡식을 외상으로 나눠줬다. 이것이 협동조합의 시작이다. 조합원 간 이해다툼이 잦을 수 있는 협동조합 체제를 유지해주는 것이 바로 이런 박애정신과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동조합 정신’이라고 한다.
6·25 전쟁 이후 우리는 정부 주도의 압축 경제성장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효율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출자금에 따라 지분을 인정받는 ‘1달러=1표’가 당연했다. 모든 조합원이 동등한 ‘1인=1표’인 협동조합 체제가 한국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 쉽지 않은 이유다.
커란 담당관은 “옛 동독이 중앙 집중 체제였던 만큼 통일 후 동독 협동조합과의 통합과정에서 우리도 그런 문제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협동조합 체제는 아무래도 주식회사 형태보다 모든 과정이 늦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오래 토론해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조직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민주화에도 협동조합이 당연히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협동조합이 대기업 횡포를 막는 건 어렵지만 견제할 수는 있다. 동네에 스타벅스가 들어오는 게 싫고, 자기 지역 농산물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협동조합을 만들면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협동조합이 잘 정착되면 대기업 못지않게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연간 매출액이 500억 유로가 넘는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하는 협동조합도 있다”면서 “이 경우 조합원들의 의견을 모아 주식회사로 기업 형태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고 소개했다.
DRV 산하의 협동조합은 1970년 1만3764개에서 2010년 2604개로 감소했다. 협동조합 간 인수·합병(M&A)이 활발해지면서 대형화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잘 성장한 협동조합은 인근 지역이나 같은 업종의 협동조합을 인수한다. 이에 따라 산하 협동조합의 총 매출은 같은 기간 174억6100만 유로에서 410억 유로로 오히려 증가했다. 협동조합의 인수합병은 조합원 총투표로 결정된다.
독일 협동조합은 환경문제 해결에도 앞장서고 있다. 최근 정부가 원자력발전소 폐기 계획을 밝히자 각 지역에서는 소규모로 태양광, 풍력발전소 등을 운영하는 협동조합이 앞다투어 생겨나고 있다. 커란 담당관은 “최근 3년간 생긴 500여개 협동조합 중 무려 300여개가 에너지협동조합”이라며 “대체 에너지 분야는 지역 환경 문제와도 연관되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태양광 또는 풍력발전소를 짓기 위해 해당 지역 주민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며 “지역 주민도 협동조합을 직접 만들어 발전소를 운영하면 전기료도 낮추고 추가 수익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DRV는 요즘 이런 협동조합을 지원하기 위해 담당자를 지정하고 법률이나 관리 문제 등을 상담해주고 있다.
독일 시민사회는 ‘협동조합이 이익집단이기도 하지만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며 ‘더불어 결정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 자체가 상생의 기본’이라는 기본 인식을 갖고 있다.
베를린=글·사진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 자문해주신 분들
▲프랑크 슈펠링 DZBank 이머징마켓 총괄책임자, 미하엘 슈타펠 이코노미스트 ▲마린 커란 독일라이파이젠협회 미디어담당관 ▲윤면식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 김인구 차장 ▲이상화 독일외환은행 법인장 ▲박부기 독일신한은행 법인장 ▲이재호 농협중앙회 EU사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