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뒤바뀐 성(性)
입력 2013-05-17 17:03
지난겨울 몬트리올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후의 이야기이다. 여느 때처럼 친교의 시간이 이어졌는데, 한 캐나다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다가왔다. 이런저런 환담을 나누던 중 어느 덧 이야기가 크라이스트 처치의 담임자인 성공회 주교로 옮겨갔다. 영국 런던 출신인 그는 몇 년 전 몬트리올 교구로 부임했는데, 나는 그의 부인을 본 적이 없었다.
성 정체성의 혼란
궁금하던 차에 나는 그 할머니에게 “주교는 결혼하셨지요(Is he married)”라고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주교는 동성애자입니다. 파트너는 조너선이고요(He is gay. His partner is Jonathan).” 주교가 동성애자이고 파트너는 조너선이라고? 조너선이라면 나의 네 살배기 막내딸을 친절하고 상냥하게 맞아주던 교회학교 선생님이 아닌가. 우리 부부는 할머니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어떤 한인 부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아들 하나를 둔 이 부부는 몬트리올의 캐나다인 교회에 출석한다. 그들이 다니는 캐나다 교회에는 존경받는 남자 장로님이 한 분이 있다. 어느 날 그 장로님 댁에 전화를 했더니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 남자는 장로님을 ‘내 남편(my husband)’이라고 불렀다. 전화를 받은 남자는 부인 역할을, 그리고 장로님은 남편 역할을 하는 동성애 부부였던 것이다. 한인 부부는 몬트리올에 산 지 꽤 되었는데 내게 몬트리올 동성애자들의 실태를 귀띔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예비군 훈련 때 봤던 한 사람이 생각난다. 그 남자는, 아니 그 여자는 예비군복에 군화를 신고 왔지만 걷는 모습이나 목소리, 화장한 얼굴이나 몸짓 등등 모든 것이 영락없는 여자였다. 예비군 중대장의 태도는 비인간적이었다. ‘야, 너, 이리 와 봐!’ 하고 그 사람을 부르더니 대놓고 욕설을 내뱉는 것이었다. 내 눈과 귀엔 분명 여자였던, 그래서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그 사람은 남자로 잘못 태어났기에 인생이 불행했을 것이다. 성(性)정체성의 혼란은 물론, 사람들의 냉혹한 시선과 포학한 행동이 그의 인생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리 없다.
하지만 선천적 동성애와 후천적 동성애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성이 뒤바뀌어 태어난 경우는 선천적 동성애에 해당한다. 후천적 동성애는 학습되거나 모방되는 경우이다. ‘여자 예비군’의 경우는 선천적 동성애이다. 선천적 동성애가 자연계에 존재하는 일부분임은 근래에 생물학적 관찰을 통해 많이 밝혀졌다. 약 450∼1500종의 동물에게서 동성애가 발견된다는 연구도 있다. 헬레니즘 전통에 등장하는 양성적 존재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os)는 선천적 동성애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경우다. 6세기 라벤나의 모자이크에 세례 받는 예수를 양성적 존재로 묘사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 예수가 ‘만유(萬有)’라는 신학적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갈 3:28, 골 3:11, 참조 마 22:30).
후천적 동성애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반성경적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직면한 성도덕의 타락은 후천적 동성애에 해당한다(창 19:4∼8).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만연했던 후천적 동성애는 신법(神法)을 거스르는 행위다(롬 1:27, 고전 6:9). 수도자들이야 성 자체를 정죄한 자들이니 동성애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집트는 후천적 동성애의 고향과 같은 곳이고, ‘금언집’에도 스쳐 지나가듯 이를 상기시키는 일화가 한둘 정도 나온다.
성경 속 창조질서
그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창 1:27)는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무엇보다도 성경은 구원과 영생의 책이지, 이를 천문학이나 생물학 서적 정도로 낮춰 폄하해서는 안 된다. 중세 천주교 시대에 성경을 천문학의 척도로 삼았다가 맞지도 않는 천동설을 고집스럽게 주장한 우스꽝스러운 역사도 있지 않은가. 창조질서 속에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은 DNA 속에 뒤바뀐 성을 부여받고 세상에 나온다. 그들이 그렇게 태어난 건 그들 자신의 잘못도 다른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글을 이렇게 쓰는 나 자신은 여전히 동성애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어차피 이해가 안 될 것이니 이해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단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어만 달라’는 소수 동성애자들의 요구 역시 이해할 길이 없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