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교회가 있었네-광터교회] 우리 마음에도 꽃이 피었지… 영성과 은혜의 꽃, 활짝
입력 2013-05-17 17:03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광터교회
광터교회는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사제리에 있다. 사제리는 모래가 많은 개울이 있어 사(沙)개울, 사재울 등으로 불렸었다. 이곳에 백운산 지류인 도화천과 매지천, 덕가산과 명봉산의 지류인 대안천이 합류돼 사제천으로 모였다가 섬강으로 흘러나간다.
하천에서 물을 대기 수월해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요동마을 또는 요골이라 불리는 촌락에 교회가 있고 교회 건너편에 광터마을이 있다. 100여 가구가 사는 요동·광터 마을이 교회의 주된 전도지역이다. 마을 가까이에 서울과 원주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나지만 발달이 더딘 시골이다.
마귀를 내치려고 그리스도인이 되다?
지난 13일 만난 광터교회 성도들은 ‘마귀가 역사했다’라는 말을 관용구처럼 썼다. 누가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말하면 “마귀가 역사했으니 교회에 나와야겠다”고 대꾸하는 식이다.
성은혜(71·여) 권사가 40년 전 별다른 이유 없이 온 몸이 쑤셨던 얘기를 꺼내자 옆에 있던 몇몇 성도들은 “이 집은 마귀가 아주 심하게 역사했네”라고 입을 모았다. 당시 그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병을 고치려고 여러 차례 무속인을 찾아갔다. 무속인은 “부뚜막에 흙을 발라서 병이 났으니 원상복구해라” “굴뚝에 올려놓은 나무토막을 치워라” 등의 ‘처방’을 내렸다. 처방대로 따랐지만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고 병원 치료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성 권사는 뒷집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말을 듣고 교회에 나
오게 됐다.
“교회 다니니까 그렇게 맘이 편하고 좋더라고. 하나님 덕분에 편하게 살게 된 거지. 마귀 같은 얘기는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돌 지난 딸을 업고 신작로를 한참 걸어가서 예배를 드렸어. ‘집안일도 내팽개치고 예수 믿느라고 완전히 미쳤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몸이 나아졌어요.”
성 권사의 남편도 35년 전 한동안 앓고 난 뒤 교회에 나왔다. 성도들이 담임전도사와 함께 집으로 찾아와 그의 건강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모습에 감동받아 믿음을 가졌다고 했다. 성 권사는 “우리 영감님은 엄청나게 고생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교회에 나왔다”며 “몸살이 나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기침을 하면 피를 토해서 여러 병원을 다녔는데도 못 고치다가 기도하는 가운데 회복됐다”고 했다.
이금석(76·여) 권사도 50여년 전 위장병을 앓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다 믿음이 깊어졌다고 했다. 그의 남편은 한 달 넘게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 않았다. 이런 저런 방법을 쓰다 “성주단지, 터주단지부터 치우고 교회에 나오라”는 이웃 성도들의 조언에 따르게 됐다. 이 권사 가정뿐 아니라 당시 상당수 주민들은 집안 구석마다 그 장소를 다스리는 신이 있다고 믿었다. 이들을 모시기 위해 집안 여러 구석에 항아리를 놓고 그 안에 쌀을 담아두는 미신이 뿌리를 내렸었다.
이 권사의 시어머니는 집안 곳곳에 붙어있던 부적을 다 뜯어내고 쌀을 담아뒀던 항아리도 깨끗하게 비운 뒤 교회에 나와 기도를 드렸다. 아들의 건강을 위해 거의 한평생을 받들었던 무속신앙을 버린 것이다. 이 권사는 “집안에서 귀신을 다 내쳤고 담임전도사님이 남편을 위해 안수기도까지 해주셨다”며 “아무것도 못 먹던 영감님이 조금씩 죽을 드시면서 회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윤영숙(79·여) 권사는 “나도 자꾸 마귀가 역사해서 병이 생겼었다”고 했다. 그는 25세 때 복수(腹水)가 차서 수술을 받았고 30여년 전에도 배에 덩어리처럼 뭉친 게 발견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윤 권사는 사찰에 다니는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다가 수술을 받은 뒤 믿음이 깊어졌다고 했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 어르신 외에도 몸이 아파서 믿음을 가지게 됐다는 여러 성도들의 얘기가 한참동안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주민들이 병을 고치겠다는 기복적인 믿음에 치우쳐 기독교의 본질을 놓치지는 않았을까. 김명섭(55) 목사는 이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고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하도록 돕는 게 교회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예전에 무속인이 많던 마을이라 토속신앙이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며 “어떤 이유로 교회에 나오게 됐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영혼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축복뿐 아니라 고통까지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인간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평가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성도들 땀으로 세운 농촌교회 선교비전
기독교한국침례회에 소속된 광터교회의 초창기 모습을 기록한 문서는 없다. 정확한 창립일조차 알 수 없다.
성도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광터교회는 50년전쯤 원주시내에 있던 한 침례교회의 지교회로 시작됐다. 당시 원주에 있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전거를 타고 매주 한 번씩 이 마을을 찾아와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이를 시작으로 차츰 가정예배를 드리던 주민이 늘었고 10명 안팎의 성도들이 주축이 돼 이 마을에 광터교회의 전신인 신광교회를 세웠다.
이후 젊은 성도들은 도시로 떠났고 교회를 세우는 데 헌신한 어르신 성도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한 성도는 “그나마 간간이 새로 교회에 나오는 주민들이 있어 교회 명맥이 유지됐다”고 했다. 1987년 2월 김 목사가 부임했을 때 성도는 7명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전도를 할 때 마을 이름을 딴 광터교회라고 소개하면 더 쉽게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교회명도 광터교회로 바꿨다. 김 목사는 “부족한 게 많은 목회자이지만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하며 전도했다”고 말했다.
성도 수는 조금씩 늘어 1990년대 중반쯤 30여명이 됐다. 예배당이 비좁아지자 성도들 사이에서 교회를 새로 짓자는 의견이 나왔다. “재정이 열악하니 좁더라도 참다가 사정이 나아지면 공사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반대도 있었다. 당시 공사비를 마련할 여력은커녕 교회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토론 끝에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선 교회를 새로 지어야 한다는 데 뜻이 모아졌다.
김 목사가 사재를 공사비에 보탰고, 성도들이 교회 건축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주민들도 벽돌을 나르는 일을 도왔다. 김경순(73·여) 권사는 “리어카로 시멘트를 나르는 것부터 철근을 엮는 일까지 공사비를 아낄 수 있는 일이라면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며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이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인들이 똘똘 뭉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6년 현재의 자리에 광터교회가 건축됐지만 큰 빚이 남았다. 다른 교회의 경제적 도움도 받았으나 공사비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김 목사 내외와 성도들은 “빚을 갚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다. 김치, 김밥, 만두, 송편을 만들어 파는 일부터 공사장 일까지 가리지 않았다. 김 목사는 “모든 성도들이 제 일처럼 고생을 해줘서 7년 만에 2억여원의 빚을 다 갚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성도들은 ‘우리 손으로 세운 교회’라는 자부심과 애착이 남달랐다. 성도 수도 꾸준히 늘어 현재 60여명이 주일예배를 드린다. 원분식(70·여) 권사는 “성도들이 갈라져 큰 싸움이 나는 교회도 있다는데 같이 고생해서 그런지 여기는 서로 사랑으로 감싸주는 분위기가 좋다”고 말했다. 다른 성도는 “시골 교회는 살림이 어려운 게 힘들지 도회지 교회 사람들마냥 이 교회 저 교회 왔다갔다하는 사람은 없다”고 거들었다.
김 목사는 “시골에서 목회를 하다 보니 어렵지 않으냐고 묻는 분들이 있지만 어디인들 어렵지 않은 곳이 있겠느냐”며 “한가족같이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 덕분에 큰 힘을 낼 수 있다”고 했다.
광터교회의 비전은 ‘선교하는 교회’다. 현재 교회 예산의 10분의 1을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등에서 사역하는 선교사 5명을 지원하고 있다. 처음에는 형편이 넉넉지 않은 시골 교회가 무슨 선교 지원을 하느냐는 불평도 있었다. 교회를 새로 지은 뒤 잠시 지원을 중단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그러나 “재정이 어려운 교회지만 우리보다 더 어려운 곳이 많으니 계속해서 작은 도움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겠느냐”며 “선교사 한 분당 10만원에서 수십만원밖에 지원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설명했다.
김 목사 자신의 비전도 땅끝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수줍음 잘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목회자보다는 척박한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모습을 꿈꿨다고 했다. 김 목사는 “은퇴하면 성도님들의 허락을 받아 선교사로 사역했으면 하는 마음에 5년 전부터 기도를 드렸다”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원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대전 침례신학대학을 나와 침신대 목회대학원을 졸업했다. 김 목사는 “오직 주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목회를 하고 싶다”며 로마서 8장 5∼6절 말씀을 암송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광터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신갈JC까지 이동해 영동고속도로 원주 방면으로 진입한다. 문막IC로 나와 동화·원주 방면으로 850m를 간다. 건등사거리에서 42번 국도 원주·동화산업단지(평창) 방면으로 5㎞를 간 뒤 광터교차로에서 광터 방면으로 좌회전해 88번 지방도로를 탄다. 광터교를 지나 만종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광대교를 건너 요동길을 따라가면 교회가 보인다.
원주=김경택 기자 ptyx@kmib.co.kr